이정아
지난 토요일이었다. 오랜만에 마당 정리하려고 청소하는 이들을 불렀다. 언덕배기에 있는 우리 집은 뒷마당이 매우 가파르다. 거실과 면한 베란다는 공중에 걸려 있는 꼴이다. 베란다에서 마당을 내려다보면 심청이처럼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들까 하는 충동이 생길 정도로 마당 깊은 집이다. 계단을 53개 내려가야 약간 평평한 평지를 만난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그 평지엔 채소를 심었었다. 아버지는 상추, 배추, 무, 토마토, 피망을 심으시고는 한국에 가셔서 다시 오지 않으셨다. 솎아주지 않은 모종이 웃자라 키가 껑충 커지고 장다리꽃이 피고 또 져도 안 돌아오셨다. 열매를 두더지와 청설모가 다 파먹도록 못 오셨다. 신장이 안 좋은 아버지는 병원에 투석을 다니셔야 했으므로 미국에 다녀가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이번에 마당 정리를 하면서 아버지가 가늘게 쳐 놓았던 금줄과 동물의 피해를 보지 못하도록 쳐 놓았던 철사 그물도 다 걷어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건사할 사람도 없으므로 지금은 채소를 심지도, 뒷마당에 내려가지도 않는다. 아버지 대신 남편만 가끔 내려가서 과일을 수확하거나 손질을 한다.
일꾼들을 따라 내려간 남편이 바구니하나 내려보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소쿠리를 던져주었더니 아이 주먹만한 귤을 열 개 남짓 가지고 올라왔다. 아버지가 7년 전에 심어 놓으신 나무에서 열린 것이라 한다. 그때 신고 배와 후지 사과, 제주도 귤 이렇게 세 그루를 한인타운의 정원수 집에서 사다 심었다는 것이다. 배와 사과는 조금 추운 듯한 곳에서라야 잘 자라는데, 온화한 이곳에는 잘 안 맞는지 발육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그 중 귤나무에서만 열매를 얻었다고 한다. 대추, 감, 포도, 복숭아, 석류, 무화과 이런 나무들도 있다고 하는데 무심한 나는, 우리 집에 그런 나무들이 있는 것조차 몰랐었다. 심심한 아버지가 종일 마당에서 뭘 하시나보다 했지 정답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이날 이때껏 내가 오로지 관심을 갖는 나무는 레몬나무이다. 부엌 창 쪽에 있어 설거지 할 때마다 보이기도 하고 열매도 예쁜 것이 물을 안 주어도 잘 자란다. 오래 전 집을 팔고 간 전 주인이 심은 것이다. 하나 따다가 생선구이 위에 즙을 뿌리기도 하고 얼음 냉수에 한 조각 띄우기도 하며 잘 쓰고 있다. 내가 찍어놓은 레몬이 없어지면 꽤나 속이 상한다. 우리 집에 심겨졌어도 가지가 옆집으로 많이 넘어가 옆집에서 종종 따가기도 한다. 그러라고 허락했음에도 물질성향인 나는 매우 아깝다. 아름답기보다 실용적이어서 내 사랑 받는 나무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버지의 귤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나면서 감정이 묘해지는 것이었다. 마치 아버지가 환생한 듯 귤을 애지중지 다루었다. 잘 씻어 나무그릇에 모셔놓고 남편에게 건드리지 말도록 명령(?)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야. 정말이지 내겐 그건 먹는 귤이 아니었다. 레몬나무에 가졌던 애정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기는 거였다.
2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 날, 아직 추운 3월이었다. 갓 다진 붉은 봉분 위로 갑자기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마치 무덤 속에서 나온 듯 착각이 들었다. 고모 딸인 사촌언니가 삼촌이다~ 소리쳤다. 손녀딸인 조카들이 할아버지~ 하고 불렀다. 숙모도 큰아버지가 가벼우시니 나비가 되었나보나 했다. 크리스천인 나는 속으로 이거 왜들 그러나? 했지만 울던 끝이라 말도 못했는데, 지금은 내가 귤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오늘 집을 나서는데, 현관 밖 빈 화분에서 노란 프리지어가 올라온 것을 보았다. 한 송이는 꽃이 피어 향기가 진동하고 나머지도 순서를 기다리며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사다 심은 구근이었다. 프리지어를 유난히 밝히는 나를 아시고 화분마다 잔뜩 심어 두신 적이 있었다. 다 비우고 이젠 다른 것을 심었는데 미처 비우지 못한 화분에서 싹이 나고 꽃이 핀 모양이었다. 꽃은 피었다 지고, 나무는 열매를 맺건만 돌아가신 아버지는 다시 못 오신다.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는 이들도 있다던데, 이 봄… 내게 노란빛은 슬픔이요 아픔이다. 주황빛 귤, 황금빛 프리지어, 노랑나비… 아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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