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엄동설한’이던 한국의 겨울이 언제부터인가 별로 춥지가 않다고 한다. 지난주 서울에 갔을 때도 생각처럼 추위는 심하지 않았다.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을이면 남쪽나라로 떠나가야 할 철새들이 한반도에 그대로 눌러앉아 겨울을 나는 기현상이다. 낙동강 하구등 남부 해안에 제비들이 여전히 날아다니고, 역시 여름철새인 왜가리가 한강 밤섬에서 눈에 띈다고 한다. 이상 고온으로 철새들이 철모르고 우왕좌왕한다고 조류학자들은 말했다.
“여기도 따뜻하고 살 만한데 왜 죽을 고생을 하며 먼길을 떠나야 하나”- 철새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다.
현재의 안락함에 맛이 들어서 때가 되어도 떠나지 않는 것은 철새만이 아니다. 독립 개체로 홀로서기를 시작할 나이가 되어도 가능한 한 부모에게 의존하려 드는 철모르는 젊은이들이 요즘 너무 많은 것 같다.
서울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화제는 언제나 자녀 걱정으로 이어졌다. 자녀들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어서 아이들의 진로·취직 걱정이 주를 이루었다.
재수, 삼수 해서 지방 대학에 겨우 들어가 있는 아들, 전공이 신통치 않아 일단 군대에 갔지만 제대하고 나면 앞길이 불투명한 아들, 졸업하고 취직이 안돼 풀 죽어있는 딸 …
딸보다는 아들 걱정이 많았다. 딸들은 대개 야무지게 제 앞가림을 하지만 아들들은 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걱정순위 1위는 지방 3류 대학에 내려가 있는 ‘도령들’. 부모 모두 명문대학 출신이니 머리가 나쁠 리 없고, 가정 환경 좋고, 강남에서 사교육비 쏟아 부으며 키운 ‘도령들’ 중에 의외로 3류 대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게으른 거지. 너무 편하게만 자라서 도무지 노력이라는 걸 안해.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아들은 평생 A/S(애프터서비스)감이란다”
교육시켜서 사회에 내놓으면 자녀들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하는데 자립능력이 안되면 부모가 두고두고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면서 한국에는 신조어가 또 생겼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이다. 그 ‘태반’은 결국 부모의 ‘애프터서비스’에 기대서 산다는 말이 된다.
한국의 한 은행이 몇달전 20대 고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드러났다. 20대 중 경제적으로 70% 이상 자립한 사람은 37%에 불과하고, 두명중 한명은 생활비의 절반이상을 부모에게 의존한다는 조사결과였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안이하게만 살려 든다”는 걱정은 미국의 한인 부모들 사이에서도 자주 들린다. 한 친지는 동부에서 대학을 마친 아들로부터 “1년만 집에서 살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심 중이다.
“밥하고 빨래하는 수고 없이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지요. 집에서 살게 해주다 보면 자동차 내주게 되고, 보험료 내주고 … 너무 의존성을 길러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의식주는 부모 집으로 들어가 해결하고 제 월급으로는 비싼 오디오나 사고, 여행이나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그는 지적했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요즘 추세인지 미국 젊은 세대도 비슷하다. 몇주 전 뉴욕타임스는 20대, 30대중 독립하지 않고 부모 집에 얹혀 사는 사람들이 많다며 몸은 어른이지만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라기를 거부하는 그들을 ‘과도기적 성인’이라고 불렀다.
2000년 센서스에 의하면 이렇게 부모 집에 기거하는 인구가 18세~24세의 독신남녀중 절반에 달하고, 연령층을 34세까지로 확대하면 25%가 된다. 불경기로 인한 취업의 어려움, 치솟는 생계비, 학자금 융자 상환 부담 등이 주된 원인이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원인은 베이비 부머 부모들이 자식들 고생하는 것을 도무지 못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새는 때가 되면 떠나야 철새이다. 사람은 성년이 되면 독립을 해야 사람구실을 한다. 우리가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아이들의 날개를 퇴화시켜 버리는 건 아닐까. ‘평생 애프터서비스’는 부모 자녀 모두에게 불행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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