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념일로
버젓이 자리매김
LA 동물원·보태니컬 가든선 본보후원 특별 축하행사
대개 음력설이 다가오는 것은 2월 초. 떡국을 먹고 한 달 정도는 지났을 무렵이다. 그런데 올해는 어떻게 된 셈인지 양력 1월1일이 지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써 음력설. 1월1일로부터 고작 3주 지난 22일에 음력설을 쇤다는 것이 익숙하지만은 않다. 오랜 농경사회를 지나오면서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은 태양력이 아닌 음력을 사용해왔다. 화성에서 찍어 보낸 사진을 인터넷으로 들여다보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 새해 시작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직 음력설이다. 그리고 화성 아니라 금성, 목성에 발을 디디게 될 미래의 어느 날에도 동양권에서 축하하는 새해는 여전히 음력설일 것이다. 단군이래 우리 민족이 지켜온 순수한 설이 바로 이날이니까.
조국을 떠나서 이런 유난을 떠는 것이 우리 한인들만은 아닌 것이 기쁘다. 여러 아시안 커뮤니티가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LA. 음력설을 맞아 중국, 일본, 베트남 커뮤니티에서는 다양한 음력설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어 이웃 나라 된 정겨움을 나눌 수 있다. 3월의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7월의 바스티유 축제일 등 미국의 기념일을 이루는 여러 인종의 축제 중에 우리들의 명절이 버젓이 올라 그 한 올을 장식하는 것은 가슴 벅찬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한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명절인 음력설에 조상들은 웃어른께 세배를 올리고 떡국을 끓여 먹었으며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를 즐겼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도 음력설은 중요하고 화려한 축제. 정월 대보름에 이르는 시간까지 그들은 사업체 문도 닫고 조상신께 한 해의 풍요를 감사 드리며 다가올 한 해에도 건강과 번영을 가져다 달라고 기원한다. 가족간의 화목을 기원하며 쌀가루와 단팥이 든 둥근 보름달 모양의 떡, 유안 시아오를 나눠 먹기도 한다.
음력설을 앞두고 남가주 일대에서는 다양한 축제들이 열릴 예정.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민재와 민지에게 음력설의 의미를 심어주기 위해 이병연씨(43, 회사원)는 아내 이수기(41,주부)씨와 함께 다음 주말 LA 동물원을 찾을 계획이다.
LA 동물원과 보태니컬 가든에서는 17일(토)과 18일(일) 이틀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음력설 축하 행사가 펼쳐진다. 한국일보 미주본사가 특별 후원하는 이번 축제에서는 화려한 원색의 아시아 민속 무용 공연, 태권도 시범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시아 대륙의 요리들을 한 곳에서 맛볼 수도 있다. 어린 자녀들을 위한 공작 테이블에서는 원숭이를 함께 만들어 보게 된다.
이병연씨는 원숭이 띠인 민재가 어릴 적 동물원에서 함께 봤던 원숭이를 한 간지를 다 돌아 다시 원숭이해에 찾아보는 것도 아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2001년 8월 LA 동물원에서는 본래 남미 브라질이 고향인 꼬리말이 원숭이(Crested Capuchin)가 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 경사를 맞았다. 이로써 LA 동물원은 브라질 이외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꼬리말이 원숭이를 보유한 동물원이 된 것. 올해가 자기네 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 5마리의 원숭이 가족은 따뜻한 오후의 햇살 아래 서로 이를 잡아주기도 하며 화목함을 과시하고 있다.
활동적이고 영리한 이들은 브라질의 정글에서도 차츰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희귀종. 음력설을 앞두고 ‘이번 주의 스타’로 지정됐으니 가서 인사를 건넨다면 무척 반가워하지 않을까.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왜 원숭이띠의 성격을 “위트가 있고 명민하며 지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이지만 잔재주를 부리기도 하고 계산적이며 신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분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자녀들에게 민속 고유 명절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동물원 방문만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지난 주말 그는 가족들과 함께 패사디나의 퍼시픽 아시안 뮤지엄(Pacific Asian Museum)을 찾았다. 다음 주말 이곳에서 역시 코리안 패밀리 페스티벌 데이(Korean Family Festival Day) 행사가 펼쳐질 터라 미리 현장 답사를 나선 것.
지금 이 뮤지엄에서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한복의 발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특별 전시를 마련하고 있다.
삼국시대, 통일 신라, 고려, 조선 왕조 등 역사 속에서의 한복의 변천을 돌아보며 그는 조상들의 미적 센스와 색채 감각에 감탄을 거듭한다.
고구려 수산리 벽화와 중국에 보관돼 있는 백제 사신도,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신라 시대의 토용과 수월관음도, 그리고 신윤복의 풍속화는 당시의 복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 그림 속에 나타난 의상을 고스란히 복원한 리플리카는 조상들의 풍류와 멋에 대한 자긍심을 높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시집갈 때 입었던 활옷은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고 관복 역시 신부와 음양의 조화를 이룬 색채에서부터 디자인까지 완벽한 조화다.
“엄마, 이거 너무 예뻐.” 화관과 용잠 등 장신구를 가리키는 민지의 손끝을 따라 이수기씨는 15년 전 폐백 드릴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시회에는 한복 입는 법의 설명과 함께 실제 한복을 입어볼 수 있는 코너도 준비돼 있어 고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자녀들에게 좋은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수기씨는 화려한 활옷과 함께 구름머리 가발을 얹어보았다.
하도 무거워 혼자서 못하고 끙끙대자 남편, 이병연 씨가 도와준다. 그의 눈에 활옷에 머리를 얹은 그녀는 15년 전 시집올 때와 조금도 변함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수기 씨는 딸 민지의 머리에 쓰개치마를 얹어 주며 조선시대 여인들이 외출 시에는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상들의 풍류를 한껏 맛본 이들 가족은 다음 주말로 다가온 다양한 음력설 행사를 더욱 알차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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