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저녁노을은 유난히도 짙어 불길한 예감 마저 들었다. 1949년 음력 6월16일, 옛적부터 여름 액을 쫓기 위한 제를 올리든 유두날이었다. 항시 소박한 섬사람들답게 토담 없이 이웃 왕래하며 훈훈하게 나누던 정으로 한 식구처럼 살아가든 고향 땅(전남 보길도)에 느닷없이 닥친 변란은 급기야 대 살육전으로까지 몰고 갔다.
앞으로 섬 사이 바다를 안고 뒤로 능선을 낀 마을 한 모퉁이를 질러 넘는 고개 마루에는 포승줄에 매인 일곱 그림자가 총살대형으로 섰다, 이어 적막을 찢는 총성은 메아리 되어 온 해안으로 토하는 선혈로 번져갔다, 정당한 법 절차가 있을 수 없는 무력만이 상대를 제압하는 절대적인 상황에서 맨손의 양민은 경찰의 총 뿌리 앞에 한낱 나무토막과 같이 쓰러져 갔다.
6.25. 사변은 분명히 우리 스스로 빌미를 제공한 동족살상의 비극이요 열강들의 이데올로기에 말린 희생양에 불과했다. 지금도 우리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 앞에 슬기로운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국제 분쟁지대로 못박여 있다는 한탄스러운 현실이야말로 지난 사변을 통하여 희생된 자들, 단순히 한반도에 태여 났다는 숙명적인 조건만으로 총알받이가 된 영혼들의 억울한 절규는 영영 묻혀 저 가고 있다.
선혈이 낭자한 일곱 희생자 중의 아버지는 심히 처참한 모습이었다, 청소년으로 인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나로선 이만저만한 첫 충격이 아니었다. 한편 당시 아버지의 죽음을 통하여 깨달은 바는, 운명은 스스로 챙기게 마련이라는 이치였다, 지금 돌이켜보건 데 당시 아버지는 나의 절대적인 구명의 메시지를 한낱 철부지의 소리로 흘려 버리지만 않았던들 참변은 면했을 터인데.
당시 전쟁은 막바지를 치닫고 있었다, 도서지방을 제외한 적군은 해상 교통수단이 단절되어 주춤거리던 반면 남단 해역으로 후퇴한 호남지역 경찰부대는 전 선박을 동원 다도해상을 초계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전황으로 급기야 치안 공백상태에 놓인 섬사람들은 진퇴유곡에 빠지고 말았다, 날로 민심은 흉흉해 질 뿐더러 유언비어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와중에 죽창부대라 칭하는 친공주의자들의 복수전으로 공포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일명 몽둥이부대로 불리는 이 집단의 성격은 과거 좌익사상가로 낙인 된 지목인을 소위 관제 보도연맹이라 결성하여 감시하던 중 6.25. 발발과 동시에 제주바다에 생 수장시키고 말았으니 그 가족의 원한, 오뉴월 서릿발에 비유하랴.
이승만 정권의 가장 큰 실책은 회유나 포용 없이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데서 종래는 엄청난 저항세력으로 등장케 하였다. 4.3. 제주 사건의 예가 그렇다.
일찍이 나는 아버지 같은 외곬 수를 본적이 없다. 일정 때는 창씨개명을 않은 채 끝내 버텼고, 한독당으로 투신 49년 5.10. 총선 출마까지 야당인으로 온갖 탄압을 받아오셨다. 나는 닥칠 엄청난 사건 직전 보도연맹 희생자 가족으로부터 넌지시 전해 준 황당한 정보를 받았다, “지금 인민군으로 가장한 전투 경찰부대 선박이 우리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당시 총선에 고배를 마신 아버지는 도서를 벗어날 기회 마저 잃고 사변을 맞이했다, 아버지는 일단 출도를 체념한 후 향토의 당면 문제로 좌우파 상호간의 반목에서 오는 희생을 극소화하기 위한 긴급 대책으로 ‘향토안전대책위원회’ 구성을 서둘기 위해 회의를 하고 계셨다. 한편 촌각을 다투는 절박 상황을 감지한 나는 회의장으로 달음박질쳐 가 아버지에게 위장경찰 상륙 소식을 전했으나 귓전으로 흘리며 묵묵히 되돌아서는 뒷모습은 나에겐 마지막으로 부자간의 영원한 이별장면이 되고 말았다.
인공기를 앞세운 가장부대는 유유히 상륙하여 도서 유지들과 담소를 나누며 내심 시퍼런 날을 세웠다, 그로부터 수분 후 본색을 드러낸 경찰은 아버지를 포함한 특정인을 대상 불문곡절 가혹한 문초를 시작했다, ‘인민위원회’ 설치의 실상을 자백하라는 것이다, 이미 정치적 음모에 따른 제거 작전인지라 아버지는 당연 주모자로 조작되어 혹독한 린치를 받게 되였다.
전원 강제 소집된 부락민은 숨을 죽이고 광장에 꿇어 곁눈질로 훔쳐보는 아버지는 방면되더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빈사상태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날렵하게 홀로 탈출한 나는 이미 나루를 건너 육안으로 들어오는 맞은편 선창 가에서 지켜보았던 흰 그림자들, 형장으로 끌려가던 일곱 사람의 가슴에서는 황막한 하늘과 땅의 거리를 재고 있지나 않았을까.
어둑어둑 검붉은 노을이 고개 마루턱에 걸리고 저승사자를 앞세운 일곱 발자국이 싸늘히 식어 갈 때 정적을 헤치고 피로 얼룩진 경찰선체는 엔진소리 흘리며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혼이 빠지다시피 한 당시 내가 마지막 본 아버지의 모습이 분명치 않다, 오직 어머니 말씀, “저 지는 별이 너의 아버지 시다”라는 밤하늘의 여운 뿐.
아직도 한국전쟁 6.25의 슬픔은 가족들의 가슴에 진한 핏자국으로 박혀있는데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의 사람들 이 엄청난 비극을 어찌 잊으려 하는가.
김탁제
약 력
▲재미수필가협회 회원
▲미주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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