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오후
새라 최(피아니스트)
지난 주말 오후 USC 교수인 대니엘 폴락 선생의 집에서 매스터 클래스 겸 저녁 식사를 동반한 리셉션이 있었다. 선생은 해마다 연말이면 학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곤 했지만, 이번에는 12월 초에 있을 실기시험을 앞둔 학생들을 배려해서 오후 3시부터 매스터 클래스를 진행하고 그 후에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로 한 것이다.
10여명의 학생이, 더러는 배우자나 애인까지 동반해서 오니까 그 수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다른 선생들처럼 각자 음식 한가지씩 들고 오라고 할 법도 한데, 선생은 항상 학생들에게 아무 것도 들고 오지 못하게 하고 모든 음식을 부인과 함께 직접 준비해서 학생들을 대접하였다.
약간 쌀쌀해진 날씨에 재킷을 꺼내 입고 베벌리힐스에 있는 선생 집에 도착하니 벌써 모두들 모여서 리빙룸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인 학생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들도 몇 있었다. 그 중 한 남학생이 눈길을 끌었다. 당연히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학생이려니 생각했는데,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더구나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청바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피아노를 칠 때 청바지만큼은 피하는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대조적으로, 그만은 훤칠한 키와 당당한 체격에 잘 어울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패트릭이라는 이름의 그 학생은 약 30년 전에 선생이 칼스테이트 노스리지에서 가르칠 때의 제자로 피아노를 전공한 후 해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파일럿이 되었다가 탑건 파일럿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항공모함에서 보내었고, 그 후 펜타곤 근무를 하던 중 다시 피아노를 공부하려고 이번에 USC에 새로이 입학하였다고 했다.
9.11 사건 당시 펜타곤에 근무하고 있었던 그가 겪은 경험담을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동료 전투기 파일럿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다는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면서, 바로 코앞의 일을 모르는 상황에서 진정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음대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시간 이렇게 피아노를 하는 동료들과 함께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훌륭한 선생에게서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히 행복한 일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여러분은 모두 행운아들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이지 말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열변을 토한 그는, 한 시간을 살다 죽더라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했다.
그에 대해 가만히 앉아서 얘기를 듣던 선생의 부인이 한마디 거들었다. 선생의 부인은 선생과 줄리어드에서 함께 피아노를 전공한 동기생이다. 대단히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2차대전 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식구가 모두 쿠바 하바나로 배를 타고 피신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재산과 미술품 거의 대부분을 유럽에 버리고 왔지만, 몇 점 가져온 그림들은 지금 선생의 집 리빙룸과 다이닝룸 곳곳에 걸려 있다.
현재 홍보회사 사장인 그녀에게 왜 이제는 피아노를 안 치느냐고 어떤 학생이 묻자,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커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하였다. 기대치에 부응하려면 하루에도 몇 시간씩 매일 연습을 해야 할텐데 회사를 버려 두고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예 피아노를 안 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줄리어드를 졸업하고 잠시 대학에서 피아노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 때 첫 월급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도 돈을 받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느껴졌던 순간이었단다. 돈의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때 받았던 그 월급이 살아오면서 가장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던 돈이었다고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선생이 연주를 할 차례였다. 부인과 학생들의 강력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선생은 바하-부조니 트랜스크립션과 쇼팽 녹턴, 그리고 리스트의 소품, 이렇게 세 곡을 연주하였다. 70세쯤 된 선생의 연륜과 그의 열정, 그리고 따스한 성품이 듬뿍 묻어나는 연주였다. 4~5년 전 대장암을 앓고 대수술을 받고 난 후 선생의 연주는 아무리 짧은 곡을 하나 치더라도 그 연주가 마치 자신의 마지막 연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진한 성실함과 진지함이 묻어났다. 선생의 연주가 끝난 후에는 아무도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다이닝룸으로 옮겨서 후식을 먹고 아쉬운 이별을 고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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