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과 피임이 같이 느는 것은 현대사회의 아이러니다. 부부가 아이를 원하는데 임신이 안 되는가 하면,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커플도 늘고 있다.
학계에 따르면 부부 10쌍 중 2쌍이 불임을 경험하며, 갈수록 증가 추세다. 불임전문센터인 차병원은 10여 년 전 10∼15%이던 불임률이 근래 들어 20%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실제로 ‘쑥쑥 잘’ 낳는다던 표현은 옛말이고, 주변만 둘러봐도 불임으로 가슴앓이 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애 안 낳느냐’는 질문도 사생활 침해다. 결혼하면 으레 ‘좋은 소식 없느냐’며 임신 소식을 묻는 한국 문화권에선 특히 그렇다. 에두른 표현이고 관심의 인사지만, 자칫 상대방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임신을 기피하는 피임 부부들도 늘고 있다. 가족계획에 따른 한시적 피임은 많이들 하지만 이 기사에선 ‘자녀 없는 삶’을 지향하는 경우임을 밝혀둔다. 2세를 원치 않는 맞벌이 부부를 가리켜 딩크(DINK·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표현에 충실하다.
임신을 갈망하는 이들과 피하는 이들. 한인 여성들의 불임 및 피임 실태, 그리고 그 이유들은 이랬다.
◇불임 실태
의학계가 정의하는 불임은 가임 연령이 된 건강한 남녀가 피임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데도 1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는 상태다. 부부가 피임을 하지 않고 부부생활을 할 경우 1년 이내에 임신할 확률은 70∼80%, 2년 이내는 80∼90%로 집계되고 있다.
임신에 가장 적절한 나이는 남녀 모두 23∼25세다. 여성의 생식 능력이 최고에 달해 난자가 강하며, 노령보다 유산 및 기형아 출산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여성은 35세 이후, 남성은 45세 이후 가임 확률이 현저히 감소한다.
불임의 원인은 다양해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거 체질적 이유가 컸다면, 최근엔 상대적으로 공해와 스트레스, 먹거리의 불균형, 다이어트 등 생활환경 따른 후유증 성격이 짙다. 가령 만성피로에 시달리거나 피임·다이어트를 지나치게 해도 몸의 균형이 깨진다고 한다.
불임 부부는 갈수록 증가 추세다. LA의 불임전문센터 ‘차병원’의 신인순 보건학 박사는 10여년 전 10∼15%이던 불임율이 최근 20%를 넘어섰다며 불임 관련 문의전화가 월평균 80∼120통, 새로 찾아오는 환자 수가 40건에 이른다고 말한다.
불임치료 전문으로 알려진 ‘엄한광 한의원’의 엄귀자 한의학 박사도 20여년 전과 비교할 때 불임 비율은 10명 중 1.5∼2명 꼴이었으나 최근 3.5∼4명까지 육박하고 있다고 밝혔다.
양·한방을 불문하고 전문 클리닉을 찾는 부부들은 별별 방법을 다 쓰다 뒤늦게 오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 박사는 4∼5년씩 맘 고생을 하다 오는 환자가 대부분이라며 으레 불임이라면 아내가 찾아오지만 알고 보면 남편에게 문제 있는 경우가 40%라고 설명했다.
◇자녀는 부부간 사랑의 결실
그러면, 이들은 불임이 ‘고통’일 만큼 왜 그렇게 자녀 갖기를 원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한인들이 유난히 자녀에 집착한다고 진단한다. 일부 불임 부부의 경우 피해의식 등 심리적 압박을 겪기도 한다는 것. 이들이 임신을 바라는 이유는 부부간 사랑의 결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나 소위 ‘대 잇기’라고 하는 종족 보존, 또는 관계가 소원해질 때 강력한 ‘끈’이 돼주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불임으로 고생하다 결혼 5년만에 임신한 오현숙(32·LA)씨는 자녀가 사랑의 결정체라는 입장. 그녀는 두 번의 자궁 외 임신 등 난관 끝에 차병원에서 시험관아기 시술로 정상 임신에 성공했다.
오씨는 자식은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자연스런 바램이라며 둘이 워낙 자유롭고 편하게 지낸 데다, 두 번 실패마저 하자 ‘갖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출산과 양육이 인간의 완성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결혼 17년 차로 자녀가 없는 이서경(가명·41·밸리)씨는 한동안 불임클리닉을 다녔으나 맘처럼 되지 않아 지금은 마음을 비운 상태.
처음부터 꼭 가져야한다든지, 아예 안 낳겠다든지 하는 극단적 입장은 아니었다며 애를 낳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덜 성숙할 것 같아 한때 노력도 했지만 지금은 신의 소관에 맡겼다고 전했다.
◇피임 실태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2002년 한국의 출산율은 평균 1.17명. 대표적 저출산국인 일본(1.33명)과 프랑스(1.89명)보다 낮은 수치다. 또 최근 이대학보가 이화여대생 2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31.5%가 ‘자녀를 가질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일부러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를 뜻하는 ‘딩크족’이나, 대신 애완동물을 키우는 ‘딩펫(Dinkpet)족’도 적지 않다.
한국보다 정서가 보수적이라는 LA 한인사회도 마찬가지다. 산부인과 관계자들에 따르면 영구 피임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많지 않지만, 피임이나 자녀 갖는 것을 연기하는 환자들이 크게 느는 추세다. 출산을 결혼 후 당연한 순서로 여겼던 과거의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노 키즈’ 현상에 대해 부부 중심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젊은 부부들이 일과 취미생활, 부부만의 자유시간을 우선해 양육 부담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이상준 산부인과 전문의는 피임 상담이 70년대보다 3배 이상 늘었다고 추산하고 전에는 ‘60대면 졸업’이라는 말처럼 출산 연령이 있었지만 요즘은 아이 없이 살다 나이 50 넘어 ‘낳아 볼까’ 하며 오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인생은 선택, 자유롭게 산다
LA에 사는 이동준(36)·은경(33)씨 부부. 올해 결혼 10년 차인 이들 부부는 전형적인 딩크족이다.
인생이 어차피 모든 걸 만족시킬 수 없다면, 자녀와 자유를 맞바꾸지 않겠다는 주의다. 디자인을 전공한 아내와 사진 전공인 남편 둘 다 여행을 좋아해 거의 매 주말 어디로든 떠나는 스타일이고, 동준씨는 최근 동부로 2년 간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동준씨가 애들을 좋아해 결혼 당시만 해도 ‘아이는 당연히 낳는 것’으로 여겼으나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부부들 중 상당수는 ‘노 키즈’를 원해도 양가 부모님의 독촉 등 ‘외압’에 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씨 부부는 둘 다 막내인데다 어른들도 개방적이라 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한다.
다른 이유는 자녀를 부부간 사랑의 볼모로 잡고 싶지 않다는 것. 주위 사람들이 지금이나 좋지, 남편이랑 멀어져봐라, 애 없으면 남남이라고 충고하지만 이씨는 서로 주체적으로 사랑하다 싫어지면 싫어지는 거지, ‘애 때문에 참는다…’ 운운하는 건 싫다고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자녀에게 좋은 성장환경을 제공해 줄 수 없다면 낳아만 놓는 게 무책임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모가 이민생활에 바쁘면 자녀들이 엇나가기 쉽다는 걸 절감했다는 은경씨는 애 없어서 나중에 외로울 거란 걱정보다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업계서 일하는 송진희(가명·32)씨는 일에 대한 성취욕과 육아 부담 때문에 자녀 갖기를 무기한 미루고 있는 상태. 아이 대신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 ‘딩펫족’인 송씨는 우선 육아에 매달려 커리어 목표를 유예하고 싶지 않고, 둘째는 시간적·재정적 부담 때문이라며 그러나 부모님 압력이 만만치 않아 대외비라고 전했다. <김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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