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히트중인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지는 임금님 수랏상이 등장한다. 식사 때면 수많은 궁녀들이 정성껏 차린 상을 하나씩 들고 일렬로 입장하여 왕 앞에 상들을 차례로 진설하고, 옆에 대기한 상궁들은 음식에 이상이 없는지 먼저 맛을 본 후 왕의 식사시중을 든다. 음식을 만든 궁녀들은 한 옆에 서서 첫 숟갈을 뜬 상감의 표정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그 표정에 따라 기뻐하기도, 낙담하기도 하는 것이다.
궁중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의 모습도 진풍경. 수십명의 궁녀들이 최고상궁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수많은 재료를 배우고 익히고 손질하여 조리하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는데 각종 식재료와 요리법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뛰어났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한편의 드라마 때문에 요즘 한국에서는 궁중요리가 유행이고, 식당, 호텔마다 특선요리로 ‘대장금 정식’을 선보이는 등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 대단한 궁중요리를 이곳서 맛보게 될 줄이야.
한달전 다이아몬드 바에서 궁중한정식 요리클래스를 시작한 조경희씨(44)가 말로만 듣던 궁중음식을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냈다. 궁중요리의 진수 ‘신선로’, 찬란한 음식의 예술 ‘구절판’을 비롯해, 탕평채, 개성무찜, 낙지산적, 오이선, 장산적, 황태구이에다가 기본 밑반찬이라는 삼색 북어보푸라기, 숫장아찌, 보쌈김치, 장김치까지 무려 12가지가 오른 상.
’바라보는 것조차 황공무지로소이다, 사람 기죽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너무 심하잖아, 이래도 되나’ 속으로 질려하고 있는데 살며시 다가온 조씨, 이건 기본 상차림이예요. 평소엔 15가지를 차려내는데 오늘은 낮상이라 변변치 못합니다라며 그나마 남은 기를 완전히 꺾어버린다.
손님초대 저녁상에는 이 외에도 갈비(구이나 찜), 도미찜, 고추장찌개가 더 오르고 계절에 따라 삼합초(갈비, 해삼, 전복 졸인 것), 산적(화양적, 누름적, 해물적)도 올리며 후식으로 수정과나 매잡과 같은 것을 낸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미리 했어야 취재 약속을 저녁으로 잡지…
조씨는 이 대단한 요리들을 모두 어디서 배웠을까. 원래 처녀성이 민씨인 경희씨는 어려서부터 늘 이런 음식을 먹고 자란 양반가문의 딸. 친정 증조부가 이조시대 마지막으로 과거에 급제한 분으로 정삼품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이 모시면서 황후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고 해요. 궁에 자주 출입하셨던 덕에 궁궐음식이 가문에 전해지게 되었죠. 더구나 며느리셨던 친할머니께서 더 좋은 양반가 출신인데다 음식을 아주 즐겨 하셔서 좋은 요리법을 많이 갖고 계셨답니다
친할아버지는 자유당 시절 내무부장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회의원을 지냈던 고 민병기씨이고 보면 과연 떵떵거릴 만도 한 집안. 조씨의 친정어머니도 요리솜씨가 뛰어나 옛날 사대부 이상의 집안에서나 해먹을 수 있었던 요리들이 몇대에 걸쳐 고스란히 외동딸 경희씨에게로 전수되었다.
아직도 양반 따지시는 친정아버지께서는 상을 격식대로 받으십니다. 진짓상, 국수상, 떡국상, 죽상… 상마다 반찬들이 다르거든요. 진짓상에는 찌개와 구이, 찜, 신선로, 구절판이 오르고요, 국수상에는 장김치와 잡채, 전유어, 그리고 죽상에는 백김치와 장산적이 오르지요
이런 정도의 ‘기본요리’는 일도 아니라는 조씨는 한국에 있을 때 요리학원에 정식으로 다니고 싶었는데 친정아버지의 반대로 학원에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일까? 하는 식이 아주 정식, 찬찬한 솜씨가 얼마나 깔끔하고 얌전한지, 먹어본 음식마다 ‘바로 내 맛’처럼 느껴졌다.
정갈하고 기품있는 맛. 과장 없고 거품도 없으며 담백하고 우아한 맛. 흰옷을 사랑하고 예의범절이 살아있던 우리 선조들의 청렴결백한 손맛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가족은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무역업을 하는 남편 조영철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둔 조경희씨는 6년전 도미,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가 한정식요리 좀 가르쳐달라는 이웃들의 성화로 한달전 클래스를 열었다. 이 역시 친정아버지는 모르시는 일, 그래도 이왕 시작한거 제대로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궁중요리를 옆에서 지켜본 느낌은 ‘정성’이었다. 손맛과 솜씨가 가장 좋은 궁녀가, 가장 정성스레 준비하고 조리해, 가장 맛있고 아름답게 장식된 것을 수랏상에 올렸던 것이다.
특별한 식재료나 조리법이 있다고 대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금처럼 음식재료가 풍부하고 요리법도 다양한 시대에는 그리 특별나 보이지 않는 음식들도 많다. 실제로 궁중요리의 진수로 여겨지는 신선로나 구절판, 탕평채 같은 음식을 한두번 맛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 지천으로 쌓여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따를 수 없는 것은 도를 닦듯 음식 하나 하나를 소중히 준비하고 상에 올렸던 옛 여인들의 정성. 손이 한없이 많이 가는 레서피들을 모두 소개하기엔 몇개 지면으로 가당치도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신선로와 개성무찜을 재료분량 생략하고 만드는 절차만 소개해보자.
<신선로>
쇠고기 사태는 핏물을 빼서 무와 양파를 넣고 푹 고아 조선간장으로 간해 둔다. 육수는 나중에 신선로에 붓고 끓이고 무는 나박썰기하여 신선로에 넣는다.
신선로에 들어가는 재료는 ▲불고기 양념한 쇠고기 우둔살 ▲다진 고기에 두부를 섞어 양념하고 동그랗게 빚은 다음 밀가루 달걀 입혀 팬에 굴려가며 익힌 완자 ▲황·백·흑지단(흰자를 반으로 나누어 반은 흰색 지단을, 다른 반에는 곱게 손질해 다진 석이버섯을 넣고 흑지단을 부친다) ▲다듬어 밀가루를 뿌리고 달걀물 입혀 팬에 지진 미나리 ▲흰살생선 전유어 ▲속껍질을 벗긴 호두, 은행, 고깔 뗀 잣 ▲물에 불린 표고버섯 ▲당근, 양파 등이다.
이 재료 중 지단, 미나리, 표고, 당근을 신선로 길이에 맞추어 골패 모양으로 썬다. 신선로 맨 밑에 양파 채 썬 것을, 그 위에 양념한 고기, 그 위에 무와 미나리 전유어, 생선 전유어를 네모지게 썰어 얹고 골패 모양으로 썰어둔 재료들을 색 맞추어 고르게 돌려 담는다. 맨 위에 견과류와 고기 완자를 고명으로 얹은 후 육수를 붓고 가운데 화통에 숯을 피워 끓는 상태로 상에 올린다.
<개성무찜>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모두 넣고 찌는 개성무찜은 고기 맛보다는 무맛으로 먹던 개성 특유의 궁중음식이었다.
무는 껍질 벗기고 손가락 굵기로 썰어 모서리를 다듬는다. 그래야 끓일 때 모서리가 뭉그러지지 않아 찜이 깔끔하다. 무를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친 후 찬물에 헹구어 놓는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핏물을 뺀 후 고기 결 반대로 넓적하고 도톰하게 썬다. 닭고기는 안심살로 같은 크기로 자른다. 고기와 무를 불고기 양념하여 따로 재워놓는다. 밤은 벗겨서 씻고 은행도 볶아서 속껍질을 벗긴다. 대추는 돌려깎아 2개를 겹쳐 얇게 썬다음 꽃모양으로 만든다. 냄비에 양념장에 재운 고기를 넣고 육수를 부어 한번 끓어오르면 중간불로 20분 정도 끓인 뒤 무, 밤, 은행, 대추를 넣고 남은 양념장으로 다시 간하여 국물이 자작해질 정도로 조린다.
<수랏상>
수랏상은 격식을 갖추어 차리는 반상을 가장 높인 말이다. 반상은 상을 받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임금은 수랏상, 어른은 진지상, 아이들은 밥상을 받았다.
수랏상은 항상 12첩 정찬으로 짝수. 민간에서는 사대부 집이 9첩, 일반은 7첩·5첩·3첩 정찬으로 홀수가 되게 하였다. 12첩 반상은 왕과 왕비만이 받는 상으로, 왕족이나 벼슬이 높은 신하라도 받을 수 없었다.
하루 2번 들어가는 정식 수라상에는 12가지 반찬이 오른다. 밥(수라)과 탕, 신선로 등 5가지 기본 반찬은 가짓수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랏상은 3개를 올리는데, 주가 되는 원반 외에 곁반, 그리고 책상반이 놓였다. 원반에는 흰수라·탕·조치(찌개)·찜(또는 선)·전골·김치·장·12가지 반찬(편육·전·회·숙란·조림·구이·적·나물·생채·장아찌·젓갈·자반)을 놓고, 곁반에는 팥수라·전골함·별식 육회·별식 수란·은공기 3개·차관·찻주발·빈 사기접시 3개를 놓는다. 책상반에는 찜·곰탕·더운구이·젓국조치·전골·고추장 조치 등을 놓는다.
이렇게 하루 두 번 수랏상을 받고 그 사이사이 세 번의 새참(이른 아침의 초조상, 점심때의 낮것상, 밤중의 야참)을 즐기면서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 평균수명이 39세였다는 조선시대 왕들을 부러워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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