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출한 저녁, 올림픽이나 버몬트를 운전하며 구이 식당 앞을 지나다 보면 한잔 술에 얼큰해진 얼굴들이 매캐한 연기를 마셔가며 고기 굽기에 열중하는 풍경이 지글지글 펼쳐진다.
길어진 해를 두고 일찍 귀가하기 멋쩍은 직장인들. 땀흘리며 밥짓고 국끓이기 귀찮아진 가족 단위 손님들. 외국인 친구들에게 불고기의 맛을 보여주고 싶은 젊은이들로 타운의 구이전문 식당들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절정은 금요일 밤, 저녁 8시 안팎이다. 이 시간대 타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고기 냄새는 대형 화로를 떠올린다. 어릴 적 석양 무렵이면 밥 때를 알려주던 밥 냄새처럼.
요즘 타운 구이식당에는 특히 2세 등 젊은 층이 눈에 띄게 늘었다. 경제활동의 주역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세대가 바뀌어도 입맛은 못 속이는 건가. 술집과 노래방뿐 아니라 이들은 ‘한국의 맛’을 찾아 타운으로 몰린다.
조선갈비, 다호갈비, 박대감네, 종로집, 만나, 서울회관, 함지박,
소리소문 없이 문닫는 곳도 있지만 타운의 구이 식당은 날로 느는 추세다. 업소록에 등재된 구이 전문 업소는 타운에만 줄잡아 40여 곳. 최근에 생겼거나 은근슬쩍 구이를 겸하는 곳을 포함하면 거의 반 백 개다.
주차장이 좁건 크건, 가격이 1인분에 26달러까지 오르건, 같이 집어먹은 생마늘 냄새가 뱃속에서 며칠을 가건 한인들은 줄기차게 구이집을 찾는다. 윌셔가의 대표적인 일식당으로 꼽혀온 ‘후루사또’도 곧 구이전문 식당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구이가 인기일까.
’패션’이라고 올림픽가 ‘종로집’의 김희선씨는 말한다. 한때 일식당 개업이 줄을 이었듯 트렌드라는 것이다. 경기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불경기에 고기라, 무슨 뚱딴지인가 싶은데 일식보다 비교적 값이 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세 번째는 날씨다. 올 여름 날씨가 평년보다 서늘했다는 것도 이유로 꼽힌다.
한국인 입맛은 어디 못 간다는 반응도 있다. 외식하면 열 번 중 일곱 번은 구이 식당을 찾는다는 데이빗 오(27)씨는 친구들과 만날 땐 고기 구우며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게 제일 편하다며 한국 사람은 역시 고기와 찌개에 숭늉으로 마무리하는 코스가 물리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타운 구이집들은 특성이 제각각이다. 오래됐으면 오래된 대로, 새로 생겼으면 생긴 대로 분위기며 맛, 메뉴, 손님 스타일이 가지가지다.
한 예로 ‘만나’는 확실하게 패티오로 갔다. 250여석이 반야외로 홀이 탁 트이고 편한 분위기라 60%가 젊은 손님이다. 생일 축하 노래를 틀면 주변에서 덩달아 호응한다. 10월엔 확장공사를 해 100여 석을 추가할 계획인데 이것도 패티오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이 업소 주인 홍성기씨는 패티오는 우리 업소의 이미지이자 영업 밑천이라며 편하게 술을 즐기러 오는 손님들이 주류라고 말했다.
’조선갈비’는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건축미와 인터내셔널 분위기, 가격이다. 우선 건축미는 지난해 건축 전문잡지 ‘아키텍처럴 리뷰’와 ‘아키텍처럴 레코드’가 주목, 널리 인정받았다. 널찍널찍한 공간감과 가든형 패티오는 타인종 손님들을 불러들였다. 타인종이 10명 중 6명 꼴이고, 주말엔 더 많다. 가격은 타운서 가장 센 수준. 생등심 1인분이 25달러99센트, 갈비는 23달러99센트다. 그래서 이 곳은 사업상 손님 접대 장소로 즐겨 이용된다. 여러 면에서 ‘폼’ 나기 때문이다.
매니저 최화식씨는 솔직히 우리 업소 만한 분위기와 고기 질이면 1인분에 30달러는 받아야 정상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삼겹살 전문 ‘종로집’은 딱 선술집이다. 주인 김희선씨 말대로 좁고, 시끄럽고, 투박하다. 김치 담는 그릇들은 짝짝이다. 에어컨이 없어서 여름엔 땀 뻘뻘 흘리며 삼겹살을 구워먹는다. 주차장도 손바닥만하다. 머세데스 벤츠가 와도 길거리에 세워야하고 위치가 후미져 밤 10시면 ‘강도가 무서워’ 문을 닫는다.
우리집요? 장사 안 돼요 주인 김씨가 너스레를 떨지만 그 말을 곧이 믿는 사람은 없다. 14년 단골들이 이 분위기 변치 말라고 부탁하는 맛에 살지
손님 정주은(30)씨는 아저씨들 많고 구질구질한데, 그게 이 집 매력이라며 아무렇게나 입고와 삼겹살에 김치 구워먹는 게 너무 편하다고 한다.
이처럼 업소마다 개성이 두드러지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갈수록 대형화하고, 패티오가 기본이 돼 간다는 것. 업소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부위나 콤보 등 메뉴 개발도 활발하다. 전통적인 갈비와 생등심, 주물럭에서 몇 해전 흑돼지 삼겹살이 등장하더니 와인에 넣어 숙성했다는 와인 삼겹살도 들어왔다. 요즘은 한국서 천겹살 또는 항정살이라고 하는 돼지 목부위가 건너와 인기몰이 중이다.
3개월 전 버몬트에 오픈한 ‘박대감네’는 ‘꽃살’이라는 새 메뉴를 선보였다. 서울 청담동이 본점인 이 업소는 ‘소고기 전문’을 고집하고 있다. 식사 메뉴도 냉면 제외하면 3-4가지로 간단하다. 대부분 구이 식당들이 일반 한식을 다양하게 겸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주인 제니 김씨는 다른 업소에 없는 ‘꽃살’이 우리 대표 메뉴라고 한다.
’동일장’과 ‘서울회관’은 먹고 나면 김치와 고추장을 넣어 밥 볶아주는 로스구이가 인기다. 고기보다 이 고소한 볶음밥 맛 때문에 오는 손님도 많을 정도. 이밖에 ‘만나’는 패티오 확장공사가 끝나면 한국서 민물장어를 공수, 구이 메뉴에 추가할 계획이다.
한편 콤보는 불경기 덕에 확실히 뜬 서민적 메뉴다. ‘참숯골’의 김주영씨는 고기와 찌개, 술을 겸해 플랫 가격에 나오는 콤보는 여러 고기를 맛보면서 비교적 가격이 싸다는 게 장점이라고 전했다.
식도락가를 자처하는 한 한인은 서울서 먹은 모서리살(항정살) 맛을 잊을 수 없었는데 이제 LA에도 들어와 즐겨 먹는다며 항정살은 업소마다 요리 방법이 다르지만 기름을 떼어내고 담백하게 구워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설명했다.
<글 김수현 기자·사진 김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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