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콩 꺼풀이 씌운 채로 상대를 찾다보니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엄마, 이모가 말렸어도 그땐 ‘최상의 선택’으로 알고 울고불고 하다가 허락을 받았었다. 아이도 낳고 되돌릴 수 없는 이제와 생각해보니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때 어른들이 조금 더 강하게 말렸더라면, 내 첫사랑이 조금 더 적극적이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놓쳐버린 선택에 대해 아쉬울 때가 많았다. “내가 단단히 무엇에 씌워도 씌웠었지” 남편도 나도 질세라 말하는 걸 보면 젊은 날의 사랑이란 서로를 눈멀게 하는 것인가 보다.
우연히 내 홈페이지에 실린 나의 결혼에 대한 글을 읽은 분이 e-mail 을 보내왔다. 나의 남편과 자신의 남편이 대학동창인 듯 하다고. 알고 보니 남편의 동기동창일 뿐 아니라 나의 대학시절의 미팅 파트너이기도 해서 많이 놀랐다.
미국여행길에 들른 그 분 내외와 상봉을 하였다. 20년도 넘는 세월을 초월해서 예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목사님이 된 예전의 미팅파트너이자 남편의 동기동창이기도 한 그 분을 통해, 그 무렵을 떠올리면서 여러 사람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하나님은 가끔 이런 유머러스한 만남을 주선하셔서 우리를 즐겁게 하신다.
그 만남이 있고 나서 잊어버리고 살았던 옛날 일들이 자꾸 되살아났다.
벚꽃이 눈처럼 휘날렸던 창경원의 밤, 고운 드레스를 입고 설레던 대학축제, 수업을 빼먹고 학교 뒤 신촌 역 에서 교외선을 타고 나갔던 오래 전 이맘때의 추억들이 왼쪽 명치를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희미한 첫사랑의 그림자도 떠 올려보았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가슴아팠던 속설.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대. 오랫동안 날 기억해 주길 바라는 이기심. 우연히 라도 마주쳤으면 하던 집착. 나 외의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등등으로 얼마나 애를 태우던 지나간 날들인가.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는 노래의 가사가 처량하게 가슴에 닿았다. 어쩌다 내 심장에 사랑은 간데 없고 페이먼트에 맘 조리는 삭막한 심장이 되었을꼬... 지나온 세월이 공연히 억울했다. 결혼 23주년을 맞는 중년의 회한인가? 바람 난 아줌마의 마음인가? emotional 한 마음이 되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면서 여러 생각들이 오고갔다.
혼자 청승을 떨다가 나무 쟁반에 수북히 담긴 땅콩을 보았다. 우리 집엔 콩깍지가 붙은 땅콩이 늘 간식거리로 있다. 집에 놀러오는 이들은 대보름도 아닌데 웬 부럼용 땅콩이냐고 묻기도 한다.
TV나 빌려온 비디오를 보며 습관적으로 까먹는 껍질 땅콩. 평소엔 그냥 무심히 지나치던 땅콩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콩 깍지 안에 얇은 속껍질을 가진 땅콩이 나란히 두 개가 누워있다. 얇은 속껍질은 우리가 말하는 콩 꺼풀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로 꺼풀을 쓴 채 누워있는 땅콩 두 개. 부부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땅콩부부입니다. 콩 꺼풀이 씌운 채 서로를 택하였습니다. 깍지 속에서 함께 볶아졌습니다.
껍질 속은 어두웠지만 함께 잘 참아냈습니다.우리를 볶아대는 바깥의 온도는 뜨거웠지만 서로 위로하며 견디었습니다. 이제 알맞게 볶아져 구수한 맛을 내는 땅콩이 되었습니다.’
이날 이때껏 살면서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보지 않았다. 근지러운 그 말 대신 이 ‘땅콩연가’를 전하고싶다. 그 깊은 뜻을, 단순한 남편이 과연 알 수 있을까?
이혼율에 있어서 만큼은 선진국을 앞지른다는 한국의 신문기사를 접했다.
참을성 없는 젊은이들이 쉽게 선택하는 ‘이혼’이라는 길이 중년에 이른 내가 보기엔 아쉽기만 하다.
살다보면 판을 깨거나 무르고 싶을 때가 없진 않지만, 결혼이란... 마주 바라보던 눈빛에서,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되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던가? 장거리 경주인 마라톤에서 단거리 주자 마냥 힘을 쏟다가, 쉽게 지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격려하며 동반 완주를 해야 할 일이다.
내 눈에 씌운 콩 꺼풀로 내가 선택한 콩 깍지이니 누굴 탓하랴. 옛사랑의 추억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옆에 누운 땅콩을 보살 필 때이다. 정신 차려야겠다.
이정아<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