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지 중 매년 여름이면 딸과 단둘이 휴가를 떠나는 분이 있다. 남편이 업무에 쫓겨 부녀가 얼굴이나 겨우 보고 사는 관계가 되자 그의 아내가 몇 해전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딸과 단둘이서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무슨 말을 할지, 뭘 하고 지낼지 은근히 긴장이 되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아빠와 딸의 여행’은 이제 딸도 아빠도 손꼽아 기다리는 연례 행사가 되었고, 해를 거듭하는 동안 딸은 10살 전후의 어린아이에서 어엿한 틴에이저로 자랐으며, 딸의 성장을 최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그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연애도 하고 결혼해 수십년을 살았어도 여자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딸이 자라는 것을 곁에서 보니 여자를 이해하겠더군요. 진작 알았더라면 삶이 더 풍성해졌을 겁니다”
‘여자를 안다’는 것은 여성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는 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아버지로 딸을 키우는 경험은 남성중심 문화에만 길들여진 남성들이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40대 이상 중년층 여성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아버지와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세대의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분이어서 아버지의 어떤 모습들, 말씀들에 대한 기억은 있어도, 같이 여행을 하거나 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낸 추억은 별로 없다.
예외가 있다면 딸 많은 집인데, 친구들 중 딸부자 집에 가보면 아버지들이 그 시대의 근엄한 아버지들과는 달리 식구들과 둘러앉아 만두도 빚고 자녀들과 장난도 치면서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딸은 남성의 굳어진 의식을 부드럽게 녹여내는 힘이 있다. 딸의 재롱에 푹 빠진 아버지들을 보면 손바닥 안에 든 조그만 미녀에게 꼼짝 못하는 거대한 킹콩이 연상된다. 힘의 질서로 살던 킹콩이 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그녀를 기준으로 움직이듯, 남성 본위의 가치관에 한점 의혹이 없던 남성들이 딸을 키우면서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깨닫곤 한다.
개선은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삼으려 드는 대중 문화의 문제성 등을 딸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는 남성들을 가끔 본다. 좀 오래 전이지만 한국에 있는 한 남자 선배는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딸을 안쓰러워 했다.
“‘병역 필 남성’을 구한다는 신규채용 공고가 왜 문제가 되는 지 몰랐어. 우리 딸이 취직을 하려고 보니 그런 조항들이 다 걸리는 거야. 대학 때 별로 공부도 못하던 동기 남학생들은 척척 취직이 되는 데 공부 잘하던 우리 딸에게는 면접기회도 주어지지가 않는 거야”
그런가 하면 한 미국인 아빠는 딸과 샤핑 몰에 갔다가 열 받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와, 누이와, 혹은 아내와 다닐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딸과 샤핑을 나가보니 남자 녀석들이 여자들에게 엉큼한 눈길을 보내고 농담을 던지는게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남성들이 여자가 성적 대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존재의 성숙에 이르려면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되어 봐야 한다는 시도 있다.
“남자들은/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결별한다. … 딸에게 뽀뽀를 하며/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중에서>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남자들은 비로소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고 시인은 말했다.
‘아름다운 어른’이 많으면 그 사회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회란 낮은 곳은 높아지고, 높은 곳은 낮아지는, 평등한 사회이다. 남성중심 문화에서 기득권 집단에 속한 아버지가 성적 소외 집단인 딸들을 가슴으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사회의 성차별적 뿌리를 뽑아내는 데 가장 큰 추진력이 될 수 있는 주체가 딸 가진 아버지들이다. 한국에서 딸 사랑 아버지 모임이 호주제 폐지에 앞장 선 것은 좋은 예이다.
모든 아버지들은 딸들의 ‘첫 번째 남성’이다. 첫 번째 남성을 보면서 딸들은 세상을 배운다. 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딸들이 살아갈 세상을 ‘아름다운 사회’로 바꿔가는 아버지들이 많아지기를 ‘아버지 날’에 기대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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