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작물은 농부의 발짝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농부가 밭을 오갈 때마다 생기는 진동이 식물체 내의 전기를 자극함으로써 성장을 촉진하는 것으로 식물학자들은 풀이한다.
하지만 이 말은 그런 과학적인 풀이보다 농부의 정성에 초점을 맞출 때 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밭에 나가 물주고, 거름주고, 잡초 뽑아주고, 벌레 잡아주는 농부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어야 농작물이 실하게 자란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삶이 너무 고단할 때,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 고독할 때, 심신이 지쳐서 다시 일어서기도 힘들 때… 그래서 마음의 밭이 적막할 때 우리는 우리 주변을 조심스럽게 맴도는 발짝 소리를 듣는다. 바쁘고 신나게 지낼 때는 안 들리다가 마음이 텅 빈 벌판같이 황량해질 때면 들리는 소리 - 자식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 그 마음의 발짝 소리이다.
‘어머니 날’을 앞두고 신문사 동료들과 부모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민사회 노부모들의 수고가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삶의 조건이 빡빡한 이민사회에서 이민 1세로 뿌리를 내리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런 성년의 자녀들을 돕느라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노부모, 특히 어머니들의 고초가 보통이 아니다.
3살, 한 살 반의 두 아이를 둔 남자후배의 경우, 노부모가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베이비 시터에게 맡겨야 하는 데 그러자면 우선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 그 부담을 노부모가 고스란히 떠맡았다.
“하루종일 아이들을 들었다 내렸다 하다 보니 저녁이면 어머니는 파김치가 되세요. 어깨가 아파서 절절 매시지요”
게다가 일년에 한두번 동부에 사는 그의 여동생이 도움을 청하면 그곳 손자들까지 돌보느라 노부부는 이산가족이 된다. 한분은 동부에, 한분은 서부에 떨어져서 각기 손자 손녀들을 보살핀다. 평생 일하고 은퇴하고 나니 더 고단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2살, 10살의 남매를 둔 또 다른 동료는 “부모님의 사생활과 자유를 빼앗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방과후 손자 손녀를 픽업해 돌보기 위해 일주일중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아들집에서 기거를 하고 주말에만 집에서 지낸다.
“노인들은 친구분들과 어울리는 것이 유일한 낙인데 자식 때문에 그런 자유를 박탈당하신 것이지요. 심장약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는 아버지, 당뇨로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손자 손녀 때문에 당신들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보고 있으려면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행여 불편한 것이 없을까, 아쉬운 것이 없을까 자녀들의 주위를 살피는 부모들의 ‘발짝 소리’로 많은 이민 가정들은 뿌리 내리고 성장해 왔다.
마음의 발짝 소리는 ‘여성’을 ‘어머니’라는 신비한 존재로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여성이 처음부터 어머니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느라 사랑과 정성을 쏟는 과정에서 어머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머니 되기가 얼마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불경이 구체적으로 잘 가르치고 있다.
부처가 어느날 길을 가다가 제자 아난에게 길가의 뼈 무더기를 여자의 뼈와 남자의 뼈로 나누라고 명했다. 아난이 난색을 표하자 부처는 이렇게 설명했다.
“남자의 뼈는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아기를 한번 낳을 때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네말의 젖을 먹여야 하므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어머니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라고 가르치는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어 부처는 어머니의 은혜로 10가지를 꼽 았다.
임신 후 아기를 태 중에 잘 보호해준 은혜, 산고를 겪으며 아기를 낳아준 은혜, 자식을 낳고 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은혜, 입에 쓴 것은 자신이 먹고 단 것만 자식에게 먹이는 은혜, 마른자리에는 자식을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 젖을 물려 키워준 은혜,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준 은혜, 자식이 먼길 떠나면 내내 걱정해주는 은혜,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는 은혜, 자식을 끝까지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은혜 등이다.
모든 생명은 어머니의 가없는 희생을 전제로 태어나고 길러진다. 그 은혜를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얼마전 모친상을 당한 한 친지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제일 가슴 아픈 건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계실 때 잘 못해드린 것이더군요”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