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와인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붉거나 흰색의 와인을 한두 잔 정도는 마시게 되는 할러데이 시즌이다. 나는 와인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나는 스카치파다) LA 교포들 사이에 와인을 사랑하는 모임인 와사모까지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술을 사랑하고 있는가 보다.
한국에서도 와인 사랑이 대단한 것 같다. 프랑스 햇 와인 보졸레 수입이 지난 4년간 10톤에서 200톤으로 늘었다고 한다. 남들이 마시니까 나도 마셔야 푼수취급 안 당하겠지.
내가 생선에는 화이트 와인, 고기에는 레드 와인을 곁들인다는 음식 관습을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 본드 시리즈 ‘007 위기일발’을 보고서였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의 식당 칸에서 제임스 본드(션 코너리)가 생선과 화이트 와인을 시키자 본드의 맞은 편에 앉은 신분을 위장한 킬러 로버트 쇼는 생선과 레드 와인을 주문한다. 식사 후 정체를 드러낸 쇼가 권총을 본드의 얼굴 앞에 들이밀자 본드는 “레드 와인과 생선이라. 내가 왜 그걸 진작 못 깨달았을까”라고 말한다.
와인은 오래 전부터 영화와 TV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007 위기일발’서 쇼가 마셨던 키안티는 식인킬러 하니발 렉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입맛을 남긴 술이다. 오스카상을 여럿 받은 ‘양들의 침묵’에서 닥터 하니발은 “사람의 간을 키안티와 함께 즐겼다”며 입맛을 다셨다.
와인도 술이라고 마시면 취하는데 사람만 취하는 게 아니라 신화에 나오는 괴물도 이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영화 ‘율리시즈’에서 트로이 전쟁을 마친 율리시즈(커크 더글러스)와 그의 부하들이 귀국하다가 식량과 식수 조달차 한 섬에 들른다. 이들은 먹을 것이 잔뜩 있는 커다란 동굴을 발견하나 굴 주인은 인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거대한 외눈의 사이클롭스. 부하들이 괴물의 밥이 되자 꾀보 율리시즈는 즉석에서 와인을 만들어 사이클롭스에게 먹여 대취시켜 잠들게 한다. 그리고 율리시즈와 부하들은 사이클롭스 눈을 큰 나무송곳으로 찔러 멀게 한 뒤 달아난다. 과음하지 말지어다.
율리시즈는 큰 구덩이에 포도를 잔뜩 넣고 부하들과 함께 맨발로 열심히 밟아대는데 와인은 통속의 포도를 맨발로 밟아 즙을 짜내는 것이 예부터 전해내려 오는 전통이다. 인기 TV 시리즈의 주인공 루시도 한 에피소드에서 포도통 속에 들어갔었다. 루시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출연을 희망하는 영화 ‘쓴 포도’를 위해 실습한다고 포도원을 방문, 통속에 들어가 맨발로 포도를 신나게 밟다가 같은 통 속의 동네 이탈리아 아줌마와 대판 싸움을 벌인다. 요절복통할 고전이 된 에피소드다.
와인 하면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서로 자기네 것이 제일이라고 자랑하지만 요즘은 캘리포니아 와인이 이들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고도 할 것이 와인. 프랑스는 2차대전 때 나치로부터 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와인을 숨기고 와인 등급에 대해 속이는가 하면 또 물 탄 와인을 속여 파는 등 온갖 수단방법을 썼었다. 히틀러는 뒤늦게 와인의 진가를 알고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 수십만병을 알프산에 있는 자신의 은신처 ‘독수리 둥지’로 공수했다고 한다. 앤소니 퀸이 주연하는 ‘산타 비토리아의 비밀’도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이 백만 병의 와인을 숨긴 뒤 이를 찾는 독일군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영화다.
케리 그랜트와 잉그릿 버그만이 나온 히치콕의 명화 ‘오명’(사진)에서는 와인 병들이 치명적 광석 은폐 용기로 쓰인다. 미국 스파이 그랜트와 그를 사랑하는 버그만이 남미의 나치 스파이 클로드 레인스의 지하실에 있는 샴페인 병들 속에서 우라늄 원광을 발견한다. 위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샴페인이 떨어지면 지하실로 레인스가 내려올 테니 두 연인이 가슴을 조리면서 긴장감이 팽팽해진다.
북가주의 유명한 포도원 나파밸리도 여러 편의 영화의 무대로 등장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름 속의 산책’. 2차전서 귀향하는 젊은 군인(키아누 리브스)과 포도원 주인(앤소니 퀸)의 임신한 딸과의 로맨스 영화다.
돈 없는 알콜 중독자들이 마시는 술이 물동이 만한 병에 담긴 값싼 와인으로 이 사람들을 와이노라 부른다. 알콜 중독자에 관한 영화로는 잭 레몬이 나온 ‘와인과 장미의 날들’이 있다. 헨리 맨시니가 주제가를 작곡해 오스카상을 받은 작품으로 강렬한 드라마다.
이 계절에 온 가족이 와인을 마시며 와인 영화들을 빌려다 보면 좋을 것이다. “해피 뉴 이어”.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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