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흙이 정직하기 때문이죠. 겉보기엔 잘 만들었어도 불에 들어가면 다 탄로 납니다. 나중에 수정할 수 없는 것도 도자기만의 특성이지요.” 권윤제·영미 부부는 함께 도자기를 구우며 사랑도 굽는다. 두 달전 한인타운 3가와 호바트의 치과건물 2층에 작은 세라믹 아트 스튜디오를 오픈한 두 사람은 도자기에 미친 44세 동갑 친구. 다른 점이 있다면 아내는 20여년간 도자기만 공부해 왔고, 남편은 공부와는 담쌓은 채 순전히 직관과 영감만으로 작업한다는 점. 도예를 가운데 두고 전혀 다른 예술 인생을 걸어가면서 서로 돕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별난 부부를 만나보았다.
“넌 뭘 이런 걸 만드냐?”
“그러는 넌 이게 뭐야?”
“내가 도예가냐?”
“그럼 도예가 하는 거 그냥 두고 봐!”
34세가 되어 뒤늦게 결혼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며 미국에 건너와, 이제 겨우 소원하던 스튜디오를 연 권윤제·영미 부부는 한 공간에서 작업하면서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틈만 나면 토닥거린다.
이유는 각자 작품세계가 분명하고 이에 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못하기 때문.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부 많이 한 아내가 공부 전혀 안한 남편의 작업을 매우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이다.
“워낙 끼가 넘치고 재능이 많아요. 오히려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림이 더 자연스럽고 좋은 것 같아요. 저보다 훨씬 멋있잖아요.”
남편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기술적인 것들은 내가 뭘 아는 게 있어야죠. 이 사람은 체계적으로 공부해 놔서 많이 도와줍니다. 특히 유약에 관해서는 전문가거든요.”
두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스튜디오의 벽과 선반에는 주로 남편의 그림과 도자기들이 줄지어 있다. 아내의 작품은 너무 커서 이 곳에서는 굽기 어렵기 때문. 대부분 LACC로 가져가 구워온단다.
한쪽 방에 그리 크지 않은 전기가마가 있다. 흙을 빚어, 말리고, 섭씨 800도에서 초벌구이를 한다. 거기에 그림 그리거나 색을 입히고 유약을 발라 두 번째로 1,180도에서 다시 한번 굽는 일들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흙으로 작품 하는 사람은 거짓말 못해요. 도자기는 불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도자기 하는 사람들은 대개 힘이 세고, 무식하답니다.”
두 사람은 남가주 한인미술계의 뉴 페이스. 미술가협회나 도예가협회와의 교류가 전혀 없이 지냈다고 한다. ‘갇힌 듯이 지내다’ 이제 얼굴을 내미는 것은 본격적으로 작업하고 싶기 때문.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한 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싹텄다. 또 작가라면 당연히 작품을 만들고, 만든 걸 팔아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즐거운 일 아닌가.
그런 생각에 작업 틈틈이 생활자기를 많이 만들고 있다. 접시, 병, 다기들이 물론 독특하고 예술적이다. “내가 만든 것을 사람들이 사다가 많이 쓴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권영미씨는 그러나 무엇을 얼마에 팔아야 할 지에 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작가라고 비싸게 팔면 누가 사겠어요. 몇십불 정도면 부담 없겠죠. 사다가 선반에 올려놓지 말고 자꾸 써서 깨지면 또 사러오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많이는 안 할거예요”
권영미씨는 홍익대 미대 도예과를 나와 88년부터 94년까지 독일 스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대학원에서 세라믹을 공부했다. 독일에 있는 동안 터키를 비롯해 유럽 일대의 각국을 돌아다니며 전통 도자기를 공부했고 94년 미국에 온 이후에도 지금까지 LACC 등지에서 계속 공부하고 있다.
“공부만 많이 했어요. 상업미술 안 하려고 계속 도망 다닌 거죠. 지금은 유약 실험에 열중해 있는데 이제 슬슬 작품을 해야 할까봐요”
그녀는 십수년 동안 ‘얼굴’을 해왔다. 사람의 모든 걸 나타내는 얼굴은 해도해도 매번 달라서 재미있는 작업. 입 하나, 눈 하나 달리 그려도 얼굴이 달라지는 모습에 매료됐단다. 요즘은 한국의 선비탈에 빠져 있다
“선비탈은 얼굴을 아무렇게나 찌그려놓고도 눈만 둥그렇게 그려주면 웃어요. 아무리 화난 얼굴, 심술난 표정을 만들어놓고도 눈만 활처럼 휘어놓으면 웃으니 얼마나 재미있어요. 가장 한국적인 탈속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우주적인 모습을 보는 겁니다.”
아내에 비해 남편 권윤제씨는 인터뷰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고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다는 그는 우선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에 관해서부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는 예술이란 걸 믿지 않습니다. 작품이니, 상품이니 하는 말도 맘에 들지 않고요. 도자기는 그냥 삶이에요. 기가 통하고, 기를 받으면 형태가 저절로 나옵니다. 손으로 만들던, 머리에서 나오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기’라고 말하고 나니까 또 걱정되네. 요즘엔 사람들이 말을 이상하게 사용해서요.”
그가 믿는 것은 ‘도’.
달마도를 그리는 사람은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도를 쌓은 것으로 그리는데 바로 그것이 권윤제씨가 추구하는 작업이란다. 정신과 도가 담긴 작업이 어느 날인가는 그와 함께 뭉쳐져 그 자신이 되는,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스튜디오 벽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그림들은 바로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림이 아니라 아무 생각 안하고 손이 가는 대로 따라 펼쳐놓은 것들이 보기만 해도 매우 철학적이다.
“도자기는 그냥 하는 겁니다. 사는 거죠. 하면서 도를 찾으면 다행이고... 이런 게 전혀 황당한 얘기들이 아닌데, 아주 쉬운 얘긴데,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들어요.”
그는 요즘 분청사기 접시에 몰두하고 있다. 끄적거리기가 편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분청사기의 이상한 형태, 과장된 물고기 그림, 좌우 대칭되지 않은 문양들이 혹시 그가 찾고 있는 도가 담긴 작업의 산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일부러가 아니라 정신과 도를 담아 손 따라가는 대로하는 작업.
도자기를 공부하는 아내와 도자기를 통해 도를 쌓는 남편.
이 부부의 사는 모습이 가마 속 불처럼 치열하고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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