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을 좋아했던 적이 있다는데, 나는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하지만 대학시절 너무너무 좋아했던 선배는 있었다. 내가 대학 1학년일 때 그 선배는 대학원생이었고, 그 다음해에 그는 아티스트 디플로마 과정에 들어갔다. 얼마나 그 선배가 멋지고 좋았는지 멀리서도 그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면 걸음을 멈추고 멀리서나마 눈으로 그가 시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쫓았다. 그 선배는 러시안 무용수 미하일 바르시니코프하고 매우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말랐고 키가 컸다. 약간 진하다 싶은 눈부신 금발에, 마치 뉴멕시코 지방의 가을 하늘색깔 같은 깊고 파란 눈을 갖고 있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났고, 항상 잘 웃으며,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성격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선배가 멋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너무나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힘차고 열정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따스하고 달콤한 음색으로 진솔한 얘기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 같은 깊은 감동이 느껴져서 항상 만족스러웠다. 잘 생기고, 성격 좋고, 피아노를 잘 치다보니 온 학교의 모든 여학생들이 이 선배를 동경했다. 하지만 내가 선배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보다는 존경에 더 가까웠다. 그 선배가 이미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저 가까이만 있어도 좋고, 자꾸 바라만 보고싶고 그랬었다.
3학년이 됐을 때, 나는 용기를 내서 선배를 초대했다. 2학년 때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로리가 그 선배와 같은 레슨 그룹이었기 때문에 나는 로리와 더욱 많이 붙어 다니며 자연스럽게 선배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선배가 한국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 전 주말에 집에 갔을 때 엄마에게 부탁해서 갈비를 재어왔다. 바로 얼마 전에 선배가 리사이틀에서 연주한 곡을 내가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들어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선배는 흔쾌히 내 청을 들어주었다.
꺅~꺅~ 소리를 지르며 흥분해서 함께 있겠다고 조르는 룸메이트를 겨우 내보내고, 나는 침착하게 갈비를 굽고 밥을 하고 김치를 꺼내고 하면서 선배를 기다렸다. 선배가 도착하고 밥부터 먼저 먹겠냐고 내가 묻자, 갈비는 나중에 다시 데워도 되지 않겠냐며 피아노부터 먼저 쳐보라고 했다. 15분이 채 안 되는 쇼팽의 곡을 두 시간 가까이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다 끝나고 같이 밥을 먹는데, 레슨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상태에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사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스티븐, 진영이 언니와 사귄지 얼마나 되었어요?”
“벌써 4년이 넘었네.”
“와…그럼 결혼은 언제 할 건데요?”
그러자 스티븐 선배가 좀 망설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글세. 진영이랑 결혼하는 거 별로 자신이 없어. 아마 결혼 안 할거야, 진영이랑.”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혼자 좋아서 나불대다가 깜짝 놀랐다.
“어, 왜요?”
“진영이를 사귀면서 진영이 부모도 잘 알게 되고, 다른 한국 가정도 많이 알게 되었어. 그런데 한국 부모들은 자식의 행복보다 자식의 성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진영이 생각도 부모님과 같고. 난 내 자식이 그렇게 키워지는 걸 원치 않아.”
“성공하면 행복해지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스티븐 선배는 정색을 하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새라, 그건 네 생각이니, 아니면 네 부모님 생각이니? 너는 성공하고도 불행한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니? 당장 우리 학교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성공한 많은 음악가들이 좋은 학교의 교수를 직업으로 가지고도 얼마나 불행한 얼굴들을 하고 걸어다니는지.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성공이라는 것은 결국 이뤄낸 결과를 두고 평하는 것인데, 과연 그것만을 이뤄낸다고 해서 행복한 삶일까 하는 생각은 그 때 미처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꿈과 뜻을 이루는 것을 성공이라고 한다면, 성공을 향한 시간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면, 과연 그 성공은 내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나의 꿈을 이루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꿈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싶다.
쇼팽 국제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린 후, 지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생활을 하는 스티븐 선배가 4~5년 전에 할리웃 보울에서 베토벤의 ‘황제’를 연주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2악장이 시작되고 나서 계속 나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하고 너무나 벅찬 감동 속에서 그의 연주를 들었다. 그 때, 그 시절에 들었던 그의 연주가 그의 음색이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되살아나는 연주였다. 따스함과 진솔함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배어있는 연주를 들으며, 선배가 그 때와 변함없이 행복 속에서 삶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연주로 인해 나도 행복했다.
새라 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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