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 나가면 한 두 군데 옛 절터를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주춧돌이나 기왓장만 남아있는 옛 절터에서 지난 세월과 세월의 풍상과 산중의 흥망을 망연히 더듬어 보는 것은 큰 공부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무상에 이길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무상에 짝하여 인간의 유위가 계속되어 끊어짐이 없다는 것도 또한 장엄한 일이다. 인도와 중국의 불교흥망도 그러하며 거의 깡그리 망가졌다고 생각한 그 곳에서 불씨가 남아 지금 불교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지식인과 상류사회를 중심했던 신라불교와 권력과 탐욕에 유착되어 부패가 코를 찌르던 고려불교는 조선왕조에 의해 그 뿌리가 완전히 뽑힌 지경이 되었다. 그 고사목에서 다시 불교의 싹이 터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조계사의 혈전을 거치고 술집과 기생방에서 승복을 보여주면서 시장바닥에 거침없이 나앉아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너무도 빠르고 무차별한 세속화에 대한 반감도 많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매우 친근하고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 하여튼 자연에도 보면 가끔 산불이 일어나서 기성의 산림을 불태우고 다시 새로운 숲을 이루듯 이 제도 종교는 역사적인 흥망성쇠를 가지게되어 부서지고 망가지지만 진리종교와 문화종교로서 다시 재생되어 역사하게 되는 모습은 좋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높은 산 석벽에 조각되어있던 80미터 높이에 달한다던 바미안 큰 부처님의 사망은 멸종과 재생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도불교는 예수님의 탄생이 있기 이 삼백년 전에 가장 붐을 이루었는데 그 막강한 힘의 분출은 카시뮈러 고원으로 터져 중앙아시아에 안착한 것이다. 여러 잡다한 부족들이 불교를 중심으로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드하르에 수도를 정하고 뭉쳐서 간다라제국과 문화를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북으로는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키스탄 등지를 석권했고 서쪽으로는 북부 이란과 터키지방을 영향권에 두게 됨으로써 당시에 터키의 지배자이던 희랍 민족과도 뒤섞이게 되어 서양에 불교사상이 스며들게 된 전초가 된 것이다.
또한 동으로는 큐쉬힌두의 좁은 협곡을 따라 중국의 최서쪽지방의 사막국가를 확보하게 되어 뒷날 천산북로를 따라 몽고와 조선땅에 불교가 유입하게 된 말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라시대에 처용가등에 나오는 아라비아인이라는 것은 사실은 중앙 아시아인들로써 우리와의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전부 이 통로를 통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북쪽의 러시아와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이란, 이락, 터키, 그리스등지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 징기스칸의 몽고군도 이 길을 휩쓸었고 로마의 십자군도 이 길을 따라 진군했으며 영국군과 러시아 군대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므로 침탈과 약탈과 혼란이 늘 있어온 지정학적 입장은 우리 조선국토가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등이 서로 길을 비켜달라는 길목이 되어 숱한 수모를 겪어야 했던 민족사적 역사와 흡사하다할 것이다.
뒷날 중국과 한국의 구도승들이 지나쳤던 구도의 길이기도 했고 신라의 혜초가 다녀온 길이 되기도 했으며 천산북로를 통한 간다라 문화의 전래는 바위에 불상을 새기는 우리나라 마애불상과 석굴과 들판에 돌부처를 깍아 모시는 석조 불상의 유래가 되어 마침내는 저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돌 부처님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험준한 산과 깊은 협곡의 암석과 동굴에다 불상을 새겼던 저 간다라 문화는 중국 돈황석존의 불상이 있게된 배경이기도 하니 바미안 큰 부처님의 실로 엄청난 그 모습은 간다라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이라할 것이다.
이 큰 부처님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하여 세계가 한 목소리로 말렸던 외침도 허사가 되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는데 어쩌면 바미안 큰 부처님의 산화하고 싶은 뜻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간다라 넓은 제국은 많은 종족의 갈등 때문에 모래알처럼 해체가 되었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 먹을 것이 없는데 전쟁은 또 인간을 도륙하여 그 비참한 아비규환은 말로써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저 구름위의 창공에 우뚝하던 바미안 부처님은 얼마나 민망하고 그 심정이 통절하였겠는가. 바미안 큰 부처님은 산산히 산화하여 통곡과 굶주림이 끝나기를 바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막은 원래가 멸종의 땅이다. 생물이 살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므로 엄격한 절약과 절제와 율법이 필요한 땅이다. 그러면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을 동경하는 꿈이 있는 순박한 인간들이다. 이 절제와 동경은 종교가 번식하기에는 가장 알맞은 토양이 되는 것이니 종교가 소금이 되는 것은 사막의 땅에서나 조금 가능한 일로써 숲이 무성하고 평야가 넓은 곳에서는 종교가 소금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이 못된다.
멸종의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종교를 진실하게 행하고 그 순수함을 간직한다. 이 진실함과 순수함이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부르짖는 제정일치로 나아가게돼서 저 사막국가들이 활로를 뚫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러한 꿈이 하루바삐 이룩되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이룩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티끌로 산화한 바미안 큰 돌부처님이시여 부디 가피력을 내려 이들을 도와주소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