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한다는 것은 매달리는 일이어서 인간의 영육을 피곤하게 만든다. 시실리 한 작은 마을의 현명한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도시로 떠나는 청년 토토에게“향수에 굴복하지 말아라”고 이르는 까닭도 과거에의 미련이 토토를 피로하게 만들어 그의 미래를 방해할까봐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피곤하면 그늘을 찾아 휴식하듯 추억은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어주는 음지와도 같은 곳. 추억하느라 느끼는 한기에서는 몸살 앓는 미열의 쾌적감조차 있어 아파도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추억은 고통의 카타르시스다.
내가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파라디조’(Cinema Paradiso·사진)를 보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린 까닭은 추억의 본질인 감상성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부끄러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감정의 사리이자 영혼을 씻어주는 목욕물이다.
‘시네마 파라디조’는 강렬한 힘과 마법을 지닌 영화에 바치는 달콤 씁쓸한 러브레터요 정열적인 사랑의 이야기이자 과거를 향수하는 추억송가다. 전후 시실리의 한 작은 마을의 유일한 극장 파라디조의 철학적인 영사기사 알프레도(필립 느와레)를 따르는 소년 토토(살바토레 카시오의 연기가 깜찍하다)의 성장기이기도 한데 토토는 영화광.
토토가 벌린 사자 입을 통해 스크린 위로 쏟아져 내리는 영사기의 불빛을 큰 눈으로 경이롭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자니 나의 소년시절이 떠오른다. 토토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엄마가 준 우유 살 돈으로 영화구경을 했는데 나는 납북된 남편을 기다리는 엄마가 사 준 사전을 팔아 극장엘 갔었다. 토토와 나는 같다.
동네 사람들의 유일한 오락장소요 그들의 인간 희로애락이 법석을 떨어대는 파라디조 극장에서 토토는 비스콘티와 안토니오니와 르느와르, 존 웨인과 실바노 망가노의 맘보 그리고 ‘7인의 신부’와 브리짓 바르도의 나체를 보면서 영화의 걷잡을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히고 만다. 토토에겐 파라디조가 있었고 토토 또래였던 부산 피난시절의 내겐 3·1 극장이 있었다. 변사 옆에 앉아 서부영화를 보는 내 심장은 말달리듯 뛰곤 했다.
서울 수복 후 나의 파라디조는 경남극장과 성남극장과 동양극장 그리고 명동극장과 우미관 같은 재개봉관들. 나는 거기서 에롤 플린의 펜싱과 게리 쿠퍼의 총 솜씨 그리고 타이론 파워와 수전 헤이워드의 뜨거운 키스를 보면서 황홀무아지경에 빠지곤 했다. 토토나 나나 영화관에서 세상과 바깥 세계를 배웠고 사랑과 꿈을 발견했다.
가난한 살림의 토토와 내겐 영화관이야말로 환상천국이었는데 토토가 이 천국에 공짜로 들어가려고 알프레도에게 사정했듯이 나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극장 앞에서 혼자 들어가는 어른들에게 나 좀 데리고 들어가 달라고 졸랐었다. 천국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었었다.
토토는 알프레도에게서 영사기술을 배웠고 알프레도의 격려로 마을을 떠난 뒤 영화감독이 되었다. 나는 영화 보다 걸려 긴 정학처분을 당하면서도 내 꼬마시절의 첫사랑을 버리지 않아 영화비평가가 되었다. 시네마 파라디조가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지금 로열극장(310-477-5581)서 상영중인 ‘시네마 파라디조’(Miramax배급)는 주세페 토나토레 감독의 디렉터스 컷. 1998년에 나온 이 영화는 칸 심사위원상과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지만 당시 상영판은 원본서 50분이나 잘려져 나간 것이었다. 이번 것은 이 부분을 복원한 3시간 짜리다(등급은 R이지만 꿈 많은 아이들에게는 보여주기를 권한다).
알프레도의 장례식에 참석 차 고향을 떠난지 30년만에 귀향한 살바토레(자크 페랑-토토는 꼬마시절 이름)의 회상으로 이어지는데 디렉터스 컷이 짧은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풍성하고 또 얘기의 깊이와 다양성도 충실하다.
복원된 영화의 중요한 얘기는 살바토레와 이제는 중년부인이 돼 장성한 두 남매를 둔 살바토레의 첫사랑이자 구원의 여인 엘레나(브리짓 포시)와의 재회. 왜 엘레나가 만나기로 한 살바토레와의 약속을 못 지켜 결국 둘이 이별하게 되었는지의 까닭이 밝혀진다. 감독의 말대로 복원판은 멜랑콜리한 대하 로맨스 소설의 내용과 모양을 지녔다.
영화는 살바토레가 알프레도가 편집한 신부님의 검열에 걸려 버려진 키스신들의 모음집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나는 또 살바토레와 함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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