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자기 시대상을 반영하곤 한다. 폭력적인 남편을 견디다 못해 그를 때려죽이는 것도 여성파워 상승의 한 양상이라면 요즘 상영 중인 서스펜스 스릴러 ‘더 이상 못 참아’(Enough)는 분명히 현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영화라고 하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어린 딸의 어머니 슬림(제니퍼 로페스·사진)은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도주한다. 그러나 남편이 뒤를 끈질기게 쫓자 여인은 희생자에서 더티 해리로 변신, 이스라엘군이 육박전 때 쓰는 치명적인 무술을 배운 뒤 남편을 가차없이 때려죽인다.
10년 전만 해도 아내는 남편을 때려죽이진 못했다. ‘더 이상 -’와 비슷한 내용의 영화 ‘적과의 동침’(1991)에서도 매맞는 아내 줄리아 로버츠는 남편을 피해 달아난다. 그러나 시골서 숨어사는 아내를 쫓아온 남편을 제거하는데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이 여인의 새 애인이었다.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여인들의 성의 대결에 임하는 자세가 보다 공격적으로 변질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이상 -’을 비롯해 올해 나온 ‘패닉 룸’ ‘하이 크라임’ ‘숫자 살인’ 등도 모두 여주인공이 공격자에 대항하거나 사건을 풀어나가는 영화들로 공격자나 범인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또 행복한 가정주부가 연하의 남자와 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부정’에서도 여자가 성적으로 공격적인 반면, 그녀의 남편은 착하기만 한 모범 가장으로 나온다.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약한 여자들은 보통 영화에서 폭한에게 쫓기며 비명을 지르다가 마지막 순간에 멋있는 남자에게 구원받곤 했다.
그러나 영화 속 여자들이 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50년대와 필름 느와르에서 여자들은 강건했고 또 사악하기까지 했다. 베티 데이비스, 조운 크로포드, 바브라 스탠윅 등이 대표적인 여배우들이다.
또 뛰어난 여자 각본가들이 많았던 30년대와 40년대에도 여자들은 남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고, 다투고 사랑했다. 스크루볼 코미디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보다 한수 위였다. 캐롤 롬바드, 캐서린 헵번, 아이린 던, 로잘린 러셀 같은 여배우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할리웃이 내용이나 정서의 깊이보다 트릭을 쓰는 통속적인 영화를 양산하면서 여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희생자의 구실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여권이 크게 신장되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여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이런 경향은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더 이상 -’가 3명의 메이저 스튜디오 여사장 중 하나인 에이미 패스칼이 지휘하는 컬럼비아 작이라는 사실이 단순한 우연 같지가 않다.
그런데 여권신장이 다소 지나쳤는지 통계에 따르면 요즘 남자를 구타하고 또 성희롱 하는 여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미법무부에 따르면 매년 84만명의 남자들이 가까운 파트너로부터 구타를 당하는데 이는 가정폭력 사건의 40%를 차지하는 수치다. LA의 각 상담소를 찾는 한인 남자들 중 아내의 폭행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도 나왔다.
뉴욕 브루클린에 본부를 둔 ‘남성 권리 찾기 연맹의 한 간부는 “가정에서 부인의 폭력에 시달리는 남편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면서 “남편은 직장에서 돌아와 가사 일을 하고 여성은 남편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샤핑을 다니는 것이 매맞는 남성증후군”이라고 말한다.
1994년에 나온 영화 ‘폭로’에서는 마이클 더글러스가 직장 상사인 드미 모어에게 성적 공격을 받고 이를 폭로했다가 모어로부터 역습을 당해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됐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 법원에서 남성상대 성희롱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20대의 신입사원이 연상의 여인들로부터 언어와 행동으로 성희롱을 당한 뒤 회사측에 이 사실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해고당하자 소송을 내 승소한 것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나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식의 슬림의 행동에 대해 동료 사원들의 의견을 물어봤다. 못된 남편의 죽음은 여인들에게 통쾌한 희열을 맛보게 하고 폭력적인 남자들에게는 경종이 될 것이라는 의견과 그것은 반인륜적이요 반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의견이 각기 절반씩이 었다.
폭력은 누가 행사하든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이 영화의 문제점은 악행에 대해서는 폭력적 대응이 있을 수 있다는 복수의식의 정당화라고 하겠다. 슬림이 쓰러진 남편을 향해 “너 남자가 왜 그 모양이야, 너 날 마구 팼지”라며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자니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거칠어졌을까 하는 생각에 입안이 다 쓰다. 브라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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