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추억에 사는 사람은 처량하다. 그는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미래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매달리게 마련이며 그의 추억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 같은 초췌한 처량함에는 저무는 쾌적감마저 있다.
파리에서 은행강도를 한 뒤 해외로 도주, 항구도시 알지에의 달동네 카스바에 숨어사는 범죄자 페페는 과거와 추억에 사는 사람이다. 이국 땅의 지하세계서 눈물을 글썽이며 자유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그는 센티멘탈한 ‘하수구의 사자’다.
어둡고 범죄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낭만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상치가 되면서 기막히게 유혹적인 기운을 발산한다. 시적 사실주의 감독 쥘리앙 뒤비비에가 만든 운명적이요 로맨틱한 갱스터 영화 ‘페페 르 모코’(Pepe le Moko·1937)가 우리에게 숨가쁜 감정적 밀물 경험을 밀어다 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암흑세계의 갱스터에 대한 동경이요,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영화는 졸린 눈에 얇은 입술 그리고 주먹코를 한 프랑스의 명배우 장 가방의 신화를 창조한 작품이다. 절망과 고독과 권태에 주눅이 들어 테라스에서 망연자실하니 항구를 내려다보면서도 결코 신적인 위엄과 강렬한 남성적 존재의 매력을 잃지 않는 가방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하니 채운다.
그런데 늘 말끔하니 정장을 하고 다니는(페페가 입은 검은 셔츠 왼쪽 가슴에 장 가방의 이니셜 J.G.가 뚜렷하다) 신사 갱스터 페페는 여자의 가슴이 고향이요 집인 사랑 없이는 못 사는 남자다(그가 죽으면 장례식에 300명의 과부가 몰려올 거란다). 페페가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수형지 같은 카스바를 버리고 도시로 내려간 것(그는 이 때도 신사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비단 네카치프를 둘렀다·사진)도 사랑하는 여인 가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페페의 이런 내리막길은 마치 지하세계에 있는 유리디체를 찾아 하계한 오르페우스를 연상케 한다. 페페의 사랑은 가히 신화적 지경인데 사랑으로 구원받고 재생하려는 반영웅인 그를 제도로 이뤄진 세상은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페페(실제인물이 모델)가 2년 전 파리서 은행강도를 하고 졸개들과 함께 피신한 프랑스 식민지 알지에의 고지대에 있는 카스바는 아랍계 지역이다. 계단과 골목길과 테라스로 이어진 미로 같은 치외법권 지역으로 온 세상의 잉여인간들이 모여 사는 유형지다.
페페는 카스바에서 존경과 두려움을 함께 받으며 왕처럼 사나 카스바는 그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 파리와 알제이의 경찰이 페페를 체포하기 이전에 그는 사실상 이미 체포돼 옥에 갇힌 상태다.
우리에 갇힌 불안한 사자의 가슴에 사랑의 불길을 당기는 여인이 구경차 카스바로 올라온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한 깊은 눈동자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파리지엔 가비(미레유 발랑). 돈 많은 늙은이의 정부인 가비와 페페의 첫 만남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동경의 눈동자가 번갈아 가며 클로스업 되면서 스크린 밖 목격자로 하여금 "큰 일 나겠구나" 하는 달콤한 염려감마저 갖게 한다. 페페와 피지 못할 관계를 맺는 또 다른 사람은 알제리인 행사 슬리만. 페페와 슬리만은 애증이 교차하는 적이자 친구로 둘이 치고 받는 대화가 신랄하다(이 영화는 뒤에 ‘카사블랑카’의 모델이 된다).
페페는 가비를 만나면서 그의 파리에 대한 그리움도 절정에 이르는데 페페가 가비와 함께 "메트로" "카페 올 레" 하면서 파리를 추억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다. 이 같은 지나간 시간과 자기 처소에 대한 그리움은 퇴색한 채 카스바에 사는 나이 먹은 여가수 타니아가 구닥다리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노래를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부르면서 수심가가 되어 페페와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코너의 카페는 어디에 갔으며, 아코디언을 타며 노래 부르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가. 아, 너희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가" 시간을 거꾸로 가는 회한 많은 영화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가비가 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난다는 말을 들은 페페는 빠른 걸음으로 도시로 내려간다. 그리고 경찰에 체포된다. 멀리 선미의 갑판 위에서 카스바를 바라보는 가비를 향해 부두의 철문(감방의 철창을 상징한다)을 붙잡고 페페가 "가비" 하고 소리친다. 이때 뱃고동이 크게 울리면서 가비는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페페는 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비를 태우고 멀어져 가는 여객선.
이 영화는 1938년 샤를르 봐이에와 헤디 라마 주연으로 ‘앨지어즈’(Algiers)라는 미국 영화로 만들어졌었다. ‘페페’는 이번에 처음으로 35mm 새 프린트로 25일까지 뉴아트극장(310-478-6379)서 상영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