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승희씨(59)는 나이보다 젊고 고운 매무새 탓에 어디 모임에 가면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눈총을 받곤 한다. 옷 색깔에 화장까지 맞춰야 집을 나서는 은근한 멋쟁이 문인. 그러나 집으로 들어서면 그녀는 곧장 ‘할머니’가 된다. 한 살부터 세 살까지 고만고만한 손자 손녀 4명을 베이비시팅하는 이씨는 주중 닷새, 아침 7시반부터 오후 5시반까지 꼬박 10시간을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하루해가 어떻게 지는 지도 모르게 살고 있다. 편안하고 고즈넉한 노년의 삶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내 손주들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어 나의 몇 년을 포기했다"는 이승희씨의 ‘손주 보기’ 24시간을 들어본다.
아침 7시가 좀 넘어서부터 아이들이 들이닥친다. 딸네(정채형·희범 부부) 아이들 예은이(3), 예진이(1.5)가 오고 곧 이어 아들네(이동형·희주 부부) 두 아이 재현이(2.5세)와 재인이(11개월)가 오면 그때부터 이씨의 하루는 시작된다.
잠옷 입은 채로 잠이 덜 깨어 오는 아이들을 얼른 받아 뉘어 한두시간 더 재우고 9시30분께 일어나면 하나씩 씻겨 각자 가방에 넣어온 옷으로 갈아 입힌다. 밥을 먹이고 그때부터 11시까지는 TV 시청시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프로 ‘바니와 친구들’을 틀어주면 꼼짝 않고 앉아서 본다. TV를 보고 나면 간식을 주며 놀리고 12시께부터는 ‘공부’를 시킨다. 아직 한 살도 안된 재인이는 따로 봐주지만 나머지 셋은 책상에 모아놓고 책도 읽어주고, 색연필과 종이를 주어 그림 그리고 낙서도 하게 한다.
그 다음은 낮잠 시간. 네 아이를 쪼로롬이 뉘어놓고, 기도하고, 자장가 한 곡 불러주고, 등 한번씩 두드려주면 모두 꿈나라로 직행한다. 1시부터 3시까지의 이 때가 잠깐 쉬는 시간. ‘막간을 이용해’ 전화도 하고, 임원 맡고 있는 문인단체의 일도 보고, 피곤할 때는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한다.
아이들이 하나 둘 일어나면 다시 먹이고 마당으로 모두 나간다. 바깥 공기 쐬며 노는 시간. 아이가 한두명이었을땐 꼭 데리고 나가 산보했는데 지금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뒷마당에서 뛰어 노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렇게 놀며 먹이며 하나씩 돌보다 보면 어느덧 엄마아빠 퇴근시간. 모두 손 씻기고 가져온 짐 챙겨놓아 갈 준비를 시키면 하루해가 저문다.
"하나 보기도 힘들어 죽겠다는데 어떻게 넷을 보느냐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생각만큼 힘든 일은 아닙니다. 일정한 스케줄을 만들고 규율을 세워 그대로 하면 아무리 어린 아이들도 말을 잘 들어요. 식탁에서 밥 한 톨 안 흘리고 잘 먹는걸요"
이승희씨는 한국서 교사생활을 오래 했고 이곳에서도 6년동안 어린이학교 선생을 한 경험이 몸에 배어있어 아이들 다루는 일이 비교적 익숙하다고 설명한다. 그 때문에 할머니 사랑을 듬뿍 내리 쏟으면서도 손자손녀 누구 하나도 스포일시키지 않고 키워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와 사위도 대만족이다. 오히려 할머니 ‘휴가’동안 엄마, 아빠와 오래 지내거나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와 좀 놀다 오면 버릇이 없어진다는 것.
그러나 말이 쉽지 이씨가 직접 베이비시팅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면 입이 벌어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졸망졸망한 어린 아이 넷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일을 만들고, 싸우다 울기도 하고, 할머니를 불러대고, 해달라는 것도 많으니, 하나 보고 나면 또 하나가 오고, 돌아서면 매달리고... 번갈아가며 감기로 아프기라도 하면 며칠간은 전쟁을 치른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먹고 잘 자야한다"는 철칙을 강조하는 이씨는 음식도 간식 하나까지 다 손으로 만들어 먹인다. 아이들이니 특별한 요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 밥하고 국을 끓여 먹이기도 하고, 김밥이나 짜장밥, 스파게티, 마카로니등 여러 가지를 해 먹이는데 네 아이가 모두 뭐든지 잘 먹어 할머니를 기쁘게 한다고. 간식은 오렌지, 사과, 포도등 주로 제철 과일들. 패스트푸드와 소다는 일체 없고, 캔디는 아주 급할 때만 쓰는 ‘비상약’이다.
이런 사정에 사실 밥 한번 제대로 앉아 먹어본 일이 없고, 아플래야 아플 시간도 없어 저녁이 되면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되어 버리지만 이승희씨는 "아이들 집에 보내고 나면 한시간도 못 돼 또 보고 싶다"며 못 말리는 할머니의 사랑을 토로했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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