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을 하다 보면 새로운 곡을 익힐 때도 있고 이전에 연주했던 곡을 다시 배우는 경우도 있다. 연주나 시험을 코앞에 두고 새로운 곡을 배울 때에는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음표들만 손에 익히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럴 때에는 마음과 기분만 급하게 앞서고, 몸이 잔뜩 긴장을 한 상태에서 무리하여 피아노를 치기 때문에 별로 오래 연습을 하지 않아도 목 뒷부분과 어깨가 뻣뻣하게 쑤시곤 한다. 내게 있어서 새 곡을 처음 접하는 것은 캄캄한 방에서 더듬더듬 가구의 배치와 윤곽을 알아내려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조바심나고 짜증나고...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전에 한 번 배웠던 곡을 다시 연습하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울 때가 많다. 특히나 몇 년 전에 쳤던 곡을 다시 대하면서 나의 그 곡에 대한 느낌과 해석이 그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곡을 연주함에 있어서 그 곡의 한 부분을 "a moment to die for"(죽도록 좋은 순간) 라고 이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것은 한 마디가 될 수도 있고, 한 소절이 될 수도 있고, 약 반페이지 정도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는 한 음이 되기도 한다.
그 곡 전체중에 가장 내게 와 닿는 부분을 찾아내어 그 부분을 특별히 공들여 표현하는 것은, 첫째로 곡의 흐름과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고, 둘째로 청중에게 내 감정을 전달할 때 초점이 맞추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훨씬 수월해지고, 셋째로 곡의 다른 부분에서 실수가 많았더라도 내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 부분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냈을 경우 그것이 오랫동안 강하게 기억에 남기 때문에 연주에 대한 만족감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 moment to die for 를 정하는 것이야말로 곡을 연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물론 한 곡이 15분을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을 특별하게 찾아낸다는 일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전혀 망설임 없이 ‘바로 여기야!’ 하고 꼭 집어낼 수 있다. 전에 배웠던 곡들을 다시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엔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와 다름없이 바로 그 부분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로 정할까, 아니면 저기로 정할까...’ 하고 망설였던 곡들은 바로 지난 학기에 배운 곡이라 할 지라도 그 때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꼭 moment to die for 뿐만이 아니더라도, 한 곡을 연습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된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프레이즈가 세 번 연속 되풀이 될 경우, 작게 시작해서 점점 크게 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크게 시작해서 점점 작아질 수도 있으며, 한문으로 석삼자를 쓰듯이 처음엔 중간 크기로 두번째는 아주 작게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크게 칠 수도 있을 것이고, 마지막에 가서 손가락의 터치를 바꿈으로써 소리의 색깔을 바꾸어서 낼 수도 있는 등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중에서 내가 10년 전에, 혹은 3년 전에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일도 흥미롭다.
그 과정에서, ‘선택’ 이란 결국 그 것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 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뭘 몰라서 한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 아무 생각 없이 포기했던 많은 보석 같은 가능성들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그래서 가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배움이 쌓일수록, 선택에 더 신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 하나의 선택으로 인해서 포기되는 것들로 인해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연습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살아가면서 하게되는 일상 생활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그로 인해 포기되었던 것들을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후회되지 않는 그런 보석 같은 선택이 내 삶 속에 얼마나 있었나를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오히려 뼈아픈 후회를 가져다주는 ‘선택’ 과 ‘포기’ 만 여럿 머리에 떠올랐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과연 포기되는 것들로 인한 후회가 훨씬 덜한 현명한 선택이 늘어갈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이 먹어가고 성숙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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