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세상사는 이야기
▶ 백재욱<리맥스100부동산 대표>
내 친구 말순이는 간신이다. 아무리 시시한 얘길 해도 재밌어 죽겠다는 듯 들어주어서 말하는 사람을 우쭐하게 만든다. 그냥 듣기만 하는게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어서 저한테 있었던 비슷한 일들도 덧붙여가며 베이스를 넣어주기 때문에, 주거니 받거니하는 대화가 마치 호흡 잘 맞는 파트너끼리 탁구치는 것처럼 기분 좋다. 또록 딱. 똑 따락.
말순이는 칭찬도 후하고 아부까지 잘 한다. 전에 한번은 한국에서 온 유명인사 친구가 며칠 우리집에 묵을꺼라고 했더니 ‘어머 걔 정말 영광이겠다. 우린 같은 LA에 살면서도 널 맘껏 못 보는데 걔는 며칠씩이나 너랑 같은 집에서 지낼테니 얼마나 좋을까’라고 나를 붕 띄워줘서 잠시 즐거운 착각에 빠졌다. 말순이는 한번도 나를 야단치거나 비난한 적이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일을 저질러 놓아도, 나는 잘 했는데 상황이 나쁘게 꼬인 것뿐이고 상대방이 나빴던 거라고 언제나 내 편을 들어준다.
말순이는 치과의사다. 그녀의 환자들은 치료를 받으면서 콜콜 잠이 들만큼 병원 오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아픈 이를 치료할 때 찬물이나 찬바람을 뿜어야 하면 말순이는 ‘물입니다’ ‘바람입니다’하고 번번이 경고를 하는데, 나는 경상도 말이 저렇게 상냥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감탄한다. 아무리 치료를 잘 끝내도 관리를 제대로 안해서 치아가 또 나빠지는 환자를 보면 말순이는 ‘이러다가 40대에 틀니를 하셔야되면 어쩌나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도 슬펐습니다’라고 말한다. 담배 피우는 환자가 쑥스러워하며 ‘아직 끊지를 못해서...’하면 ‘아주 쪼끔만이라도 줄여볼 수 있으세요?’라고 물을 뿐 끊으라는둥 몸에 나쁘다는둥 훈계하지 않는다. 해독을 알면서도 계속 피우는 우유부단함이나, 하루 세 번의 양치질과 식후의 플로싱을 못 지키는 게으름이 스스로 부끄러운 사람을 말순이는 야속하게 몰아세우지 않는다.
토랜스로 가든그로브로 병원 두군데를 바삐 오가면서도 저녁 식탁은 꼭 자신이 준비하는 주부. 애들 셋과 먼저 식사를 끝내고, 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독상을 따로 차리곤 언제나 그 곁에서 ‘수청’드는 다소곳한 아내. 매일 새벽 네시면 일어나서 성경읽고 묵상하고, 도시락 챙기고, 운동하고, 독서와 공부를 평생 놓지 않는 모범생이지만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남에게 들이대어 판단하지 않는다.
내 주위엔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매사에 내가 기준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 아무개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하고 내 입장을 그들에게 대입해보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 말순이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최선의 선택이 필요할 때 각각 그 방면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였을까. 그렇지만 결과가 불안하거나 예상한대로 안돼서 속이 상할땐 영락없이 말순이만 떠오른다. 이건 네가 잘못한거고, 저건 그쪽 말이 옳은거라고 분석이나 충고를 해주는게 아무리 약이 된다해도, 내 상처가 너무 처참할 때는 그 ‘지당하신 말씀’을 들을 힘조차 없을 때가 있다. 간신 말순이가 내 역성을 들어주고 아부를 해주고 자신의 실패담으로 맞장구를 쳐줄 때 비로소 나는 내 잘못이 어디 있었나 발견하고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고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힘을 얻는다.
말순이를 보면, 늘 혼자서 눈 밝은 척하고 남의 일에 재판관처럼 시시비비를 판단하던 나를 후회하게 된다. 아이가 친구와 다투고 울며 돌아왔을 때, 남편이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형편없이 참패했을 때, 누가 경우없는 주장을 벅벅 우길 때 나는 어땠었던가.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나 자신조차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옳고 바른 것을 알려야 한답시고 가위질 칼질 망치질 송곳질 다하지 않았던가. 우리 엄마는, 내 아내는 공정한 정의의 편일뿐 ‘내 편’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들을 얼마나 쓸쓸하고 기댈데 없게 만들었을까.
오늘부터라도 나는 간신이 되기에 힘쓸테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고객에게, 이웃에게, 말순이가 내게 그렇듯, 무슨 일이 있든지 난 언제나 당신편이란 걸 알게 할테다. 세상에 바보는 아무도 없어서 제 잘못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아는 법. 충고는 결국 본인의 몫이고,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건 바로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간신의 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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