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
▶ 전효숙 (윌셔연합감리교회 지휘자)
도심의 한 가운데를 헉헉거리며 헤매다가 겨우 주차 공간을 하나 찾았다. 골목길을 접어 들어와 얻은 횡재인지라 스트릿 파킹이다. 이미 뒤에는 차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나의 주차 솜씨를 구경하고 있다. 누가 암말 하지 않아도 등줄기에선 땀이 흐른다. 끙끙대며 끼워 넣긴 했지만 아무래도 지나가는 차들에게 미안하다. 혼자 툭 튀어나온 것 같고, 어쩌면 심뽀 고약한 경찰이라도 만나면 딱지를 떼일 것만 같았다.
그래도 요리 조리 앞뒤를 살피고는 약속 장소를 향해 도망가듯 냅다 뛰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구형 올즈모빌 한 대가 너무나 웃기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건 주차가 아니라 아예 차를 길가에 버려 놓은 듯 했다. 지나가는 차들은 모두 속도를 늦추며 주인이 있으면 한마디하겠다는 표정으로 한번씩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더 웃기는 건, 자동차 뒷 유리창에 붙어있는 문구였다. "할배 운전. 늦게 가서 미안합니다."
’할배 운전’이라는 단어는 위쪽에 크게, ‘늦게 가서 미안하다’는 말은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씌어 있었는데 상당히 달필이었다.’초보 운전’이란 말을 듣긴 했어도 ‘할배 운전’이란 말은 첨이다. 필체로 보아 자동차의 주인은 진짜 할배인 것 같았다. 구부러질 데에서 적절히 구부러지고 뻗칠 때에 힘있게 뻗치는 것으로 미루어 붓글씨에 일가견이 있는 분으로 생각됐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펜으로 잉크를 찍어 글씨를 쓰던 세대임에 틀림없었다. 글자 하나 하나에 인격이, 정성이, 태도가 드러난다고 배우고 가르쳤던 세대 말이다.
나는 갑자기 발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몸가짐을 바로 하고 천천히 걸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조금 늦겠으나 당신을 정중히 만나겠다’는 멧세지였다. 할배는 나에게 미소를 머금게도 했지만, ‘느림의 미학’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셨다. 다급하게 치닫는 내 꼴을 보고 점잖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억센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사는 나에게 사람들은 ‘인간 문화재’라고 놀리지만, 적어도 나는 글쓰기에서 조차 사투리를 마구 사용할 만큼 무식하지는 않다. 한데, 이 어른은 당당하게 자신을 할배라고 하시니 참으로 편안한 멧세지였다. 차가 낡긴 했어도 안팎이 모두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도 잘 어울렸다.
길을 건너기 위해 걸음을 멈추니 반대편 길에는 더 재미있는 문구가 매달려 있었다. "할멈 숨두부"라고 쓰인 간판이 보란 듯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간판을 보는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무나 속보이는 상술이 아닌가? ‘할멈’이란 할머니를 낮게 이르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자신보다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자신의 할머니를 이를 때 쓰는 말, 또는 그 반대로 지체가 높은 사람이 지체가 낮은 사람의 할머니를 이를 때 쓰는 말이다. 표준말이긴 해도 욕설에 가까운 ‘할망구’ 보다는 조금 나을 정도다. 식당 주인은 겸손하게도 자신의 할머니를 손님에게 낮추어 부르려는 것일까, 손님은 왕이니까? 하지만, 할멈은 그 뒤의 숨두부라는 말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조화를 이룬다. ‘숨두부’는 순두부의 사투리다. 사투리를 쓰는 것은 이른바 ‘토속’ ‘고향’ ‘시골’을 가게 이름에 붙이는 식당 주인의 의도와 다를 바 없다. 두부라는 음식의 자연 친화성, 향수, 나아가 무공해의 이미지까지 획득하려는 상술이다. 그러므로 ‘할멈’은 할머니의 정성, 무조건적인 희생,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음식에 덧입히자는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왜 하필 할멈인가.
나는 ‘할배’의 여유나 유머러스함과, 공중에 높이 매달려 애처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할멈’이라는 단어에 묘한 대비를 느꼈다. 그 ‘할멈’의 솜씨로 만든 두부를 먹어볼 생각은 나지 않았다. 진짜 ‘할멈’이 주방에서 무얼 만들고 있을 성싶지도 않았다. 있다면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도록 내버려두겠는가. 내버려두는 할멈이라면 그 음식 맛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는가. 음식은 자존의 표현이고 보시이다. 그걸 모르면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만 먹을 일이다.
할멈의 약삭 바름을 못마땅해하는 나에게 할배의 여유는 그 마저 즐겁게 한다. 나도 언젠가는 할배 운전을 할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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