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칼럼 - 세상사는 이야기
▶ 전효숙 <윌셔연합감리교회 지휘자>
나는 어릴 때부터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점잖게 표현하자면, 비교적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몸이 약해 웬만한 일에는 쉬 지치지만, 여행만은 그렇지 않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돌아다녀도 별로 에너지가 모자란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유학을 하면서 한번도 서머 스쿨이란 걸 해 본적이 없다. 그 때 좀 덜 돌아다니고 공부를 했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박사학위 몇 개는 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후회가 있다면, 그 때 시간과 돈이 없어 좀 더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못 가본 곳에는 아들이라도 가 보게 하고 싶었다. 젖도 떼지 않은 녀석을 자동차에 태우고 수 백마일 씩 달리기가 예사였다. 아들은 언제 잠을 자야하고 언제 챙겨 먹어야 하는지를 눈치채고 스스로 살아 남는 방법을 체득했다. 엄마의 전통에 따라, 서머 스쿨은 초등학교 때부터 아예 가지 않는 것으로 알았고, 방학 때는 당연히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잘쯔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를, 프라하에서는 카프카를, 빠리에서는 밀레를, 바르셀로나에서는 피카소를 만났으며, 피렌쩨에서는 다빈치를 만났다. 이들을 모두 아들의 친구로 삼았으니 내 맘은 늘 부자였다. 증기선을 타고 몇 시간씩 뱃길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보덴제> 호수를 만나 탄성을 지른 것도 그 때의 일이고, 알프스에 올라 끝없는 초원을 내려다보며 세상은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외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미국에서 만난 태평양과 광활한 그랜드 캐년은 세상이 크고 아름답다는 나의 외침을 증명해 주기에 더욱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아들에게 숨기고 싶은 게 있었다.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사춘기 때의 가슴앓이를 온통 쏟아내어 버렸던 너무나 초라한 "내 맘의 호수"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난 해, 나는 아들을 또 다시 유럽으로 보내고 혼자서 한국으로 갔다. 오랜만에 찾은 남매지 연못은 주변이 온통 대나무 숲으로 자리를 빼앗겨 휘휘 바람소리를 내며 썰렁하게 남아 있었다. 바람은 내 가슴을 싸하게 적셔왔고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던 세월의 물결을 일렁이게 했다.
글쎄, 이게 호수라고 한다면, 아들 녀석은 콧방귀를 낄지도 모를 일이다. 군데군데 풀덤불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고, 가물어 바닥이 보일 듯 낮아진 수면에는 온통 새파란 이끼가 촘촘히 덮어 틈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온갖 말똥 소똥들도 방천 둑을 더럽히는데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시집 못 가서 빠져 죽은 처녀 귀신이 나온다고도 했고, 백년 묵은 이무기가 보름달이 뜨면 하늘로 오른다고도 했다. 나는 거기서 꿈을 먹고 자랐고, 나는 그곳을 온통 내 어린 시절의 신기루로 삼아왔다. 이 비밀스럽고 애틋한 "내 맘의 호수"가 아들에게 들켜 시시하고 형편없는 곳으로 전락되는 꼴은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며칠 후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이 몇 달 동안 혼자서 일본을 거쳐 한국을 다녀오겠단다. 너 정말 괜찮겠니? 거기는 말이야, 너무 복잡하거든. 자동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한 곳이야. 산? 글쎄, 거기도 높은 산이 있으려나? 강? 글쎄, 거기도 넓고 긴 강이 있으려나? 바다? 글쎄, 미국만큼 넓고 시원한 바다가 있으려나? 박물관? 루불이나 스미소니안 같은 곳이 거기에는 없단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내 맘의 호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겨워하는 녀석을 붙잡아 앉혀 남매지 연못이 왜 "내 맘의 호수"인지를 소상히 설명했다. 알아들었으면, 함부로 "내 맘의 호수"가 작고 더럽고 냄새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들아. 호수는 여러 가지가 있단다. 증기선을 타고 몇 시간씩 달릴 수 있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가 하면, 맘속에 깊이 담아 오랫동안 꺼내 보며 냄새를 맡고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호수도 있단다. 그래, 부디 많이 싸돌아다니려무나. 그곳에 가면, 세상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엄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거야. 난 네가 스케일이 큰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 "내 맘의 호수"에 서면 그 애틋함에 반해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 같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싸돌아다니는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즐거움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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