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에 자브로브스키라는 선생님이 계셨다. 한국말을 어찌나 잘하던지, 우리가 오히려 그 분에게서 우리말을 배워야할 정도였다. 독일어작문 시간을 담당하셨었는데, 한국의 동시나 동요, 시조 같은 것을 칠판에 주욱 써놓고, 독일말로 번역하라고 해서 참 애도 많이 먹었다. "아이가 꽃밭에서 넘어졌습니다/ 정강이에 정강이에 빠알간 피..." 이런 동시나 ‘바람이 머무는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이런 시조를 번역하라면 정강이를 무릎으로 잘못 알고 있던 학생들도 많았고 머흐레라가 무슨 소린지 감조차 못잡아 쩔쩔 매기도 했다.
190cm의 키에 체중이 95kg 정도되는 거구라서, 웬만한 의자에 앉기가 겁이 난다고 당신 스스로를 ‘짜브라뜨릴 스키’라고 부를만큼 한국말을 마음대로 구사하는 분이었다. 그런 양반이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는 한국말중의 하나가 ‘놀자’요, 다른 하나가 ‘복덕방’이라고 했다.
영어로 하자면 ‘play the piano’ 또는 ‘play tennis’ 처럼 무엇을 하고 노는지 그 동작이 분명한데, 한국사람이 ‘논다’고 하면 참 헷갈린다는게 그 분 얘기였다. 모여서 저녁먹고 TV만 멀뚱히 보거나, 잡다한 수다를 떨다가 일어나면서도 "잘 놀다갑니다" 인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고, 주말 왼종일을 잠만 자놓고는 "어젠 잘 놀았다"라는 표현을 쓰는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심지어 실직상태일 때 "그냥 놀고 있습니다"라든가, 상대방을 조롱할 때 "놀고 있네"라고 하면 한국말 배우기가 너무 요원한 일 같아서 힘이 쭉 빠진다고 그 독일인 교수님은 고개를 설설 저었다.
간판만 보고는 도저히 뭐하는데인지 알 수가 없는 복덕방은 또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말이냐고, 집 팔고 사주거나 방세 놓고 구해주는데서 왜 복(福)이나 덕(德)을 운운하는지 정말 알수가 없다는게 선생님의 요지였다.
13년전 처음으로 한국일보에서 부동산판을 만들었을 때, 내 이름옆에 ‘행콕팍 쪽집게’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달아, 사진과 회사전화번호만 간단히 광고를 냈을 때 얘기다. 웬 할아버님 한 분이 전화를 걸어 "아 거기가 뭐하는데요?" 하신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뭐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걸으셨습니까?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여쭈었다. 할아버님은 한숨을 푹 쉬시더니 "뭔 쪽집게라고 했길래 내가 하도 답다-압일이 많아서..."라며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하셨다. 난 돌아가신 친정아버님 생각도 나고 해서, 다른 전화를 모두 차단시킨채 한 30분쯤 이야기를 들어드리다가 결국 찹살떡 한 상자를 사들고 댁으로 찾아가게까지 되었다. 아들, 며느님 퇴근시간까지 붙들려(?) 있다가 손주들 학교숙제까지 보아주게된 그 때의 인연은, 지난 해 그댁 손녀의 신접살림 콘도를 중개하는 것까지, 금년에는 그댁 공장 옮기는 일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다.
젊었을때는 그저 누구에게라도 호락호락 보이기가 싫어 쪽집게라는둥 ‘똑! 소리’가 난다는둥의 광고문귀로 단단한 갑옷을 입고자 했다. 세무대장에 건평 3천스케어피트라고 써있어서 중개한 집이 실제로는 3천5백이더라고, 유지비가 더 많이 들게 생겼으니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까지 겪게되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직업을 갖고 나서 참 여러 손님, 별의별 사연, 소중한 친구와 인연들을 아주 많이 만나고 겪었다.
이제 나는 갑옷을 한꺼풀씩 벗고자하는 마음공부에 힘쓴다. 너무 두꺼운 갑옷을 켜켜이 입다보면 맨살이 평생 햇살과 공기를 받지 못해 안에서 문드러지는 것을 알만한 나이가 되어가나 보다. 좀더 편편하고 만만한 사람, 누구라도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사람, 남들에게 좀 호락호락하게 보이는 사람이 되기를. 아니 그 오랜 세월동안 타인의 시선에 좌우돼 정작 나 자신의 마음찾는 길을 잃어버린 생으로부터 이제는 온 길을 되짚어, 부드럽고 말랑말랑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탄력있는 어린아이의 신축력을 복원하고 싶다.
건물과 토지와 비즈니스의 법적중개를 사무적으로 담당하는 부동산 ‘기술자’가 되기보다 매일 만나는 이들에게 복을 주고 복을 나눠받으며 덕으로 대하고 덕을 얻어가지는, 복·덕이 쌓이는 방의 주인이 되고 싶다. 안식년을 맞아 LA에 ‘놀러’ 오겠다는 자브로브스키 교수님께 복덕방이 왜 더 좋은 이름이고, 우리 한국말이 얼마나 너그럽고 품어안는 말인지를 가르쳐 드리고 싶다.
<약력> 1951년 서울 출생. 경기여중·고 졸업. 외대 독일어과 졸업. 전 동양통신사 기자. 한국일보 LA미주본사 기자. 현 리맥스 100 부동산회사 운영.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