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푸른 밤, 애끓는 사랑과 쓰라린 이별의 장소로 이름난 대동강 부벽루. 심순애는 사랑하는 애인의 바지 가랑이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져 흐느낀다. “떠나지 말아요. 제발! 날 두고 가지 말아요!” 그러나 검은 학사모에 교복을 차려 입은 청년 이수일은 구둣발로 그녀를 차버리며 내뱉는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리도 탐 나더냐!” 때로는 “내 바지 놔라. 골덴 텍스 찢어진다!” 한마디 덧붙여 코메디로 만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여기까진 누구나 잘 아는 스토리. 100년전 연애소설 장한몽의 유명한 이별 씬이다.
그후에 심순애는 어찌 되었을까?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억압, 낭만성으로 위장된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회오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대동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한다. 한국소설사에서 그녀는 정신병동에 입원한 최초의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앓았던 병은 소위 멜랑콜리아형 우울증( major depression with melancholic features)이다. 정신질환에서 분류하는 우울증은 크게 네 가지. 주요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조울증), 기분 부전 장애, 기분 순환 장애가 그것이다. 이 중 멜랑콜리아형 우울증은 주요 우울증의 한 종류로 중증이다.
멜랑콜리아형은 아시안 가운데 유난히 한국인에게 발병률이 높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정홍진, 홍진표, 2013). 한국인이 앓고 있는 우울증 전체의 43%가 멜랑콜리아형이고, 한국인은 아시안 평균치의 1.5배의 유병률을 보이며, 자살 위험도 다른 민족의 2배 이상이다. 이 타입 환자들의 특징은 즐거운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심한 식욕감퇴와 체중 감소, 안절부절 못하거나 행동이 느려지며,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찍 깨고, 아침에 모든 증상이 더 심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밤에 잠들기도 쉽지 않은데 술로 잠을 이루려고 할수록 충동성과 초조 불안이 늘면서 결국 새벽 시간의 자살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과 중국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큰 지역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동남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생긴다.
멜랑콜리는 흔히 우울, 비애, 슬픔, 애수, 침울 같은 감정을 말할 때 자주 쓰인다. 본래는 ‘검은 담즙’이라는 뜻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체액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그중 하나인 흑담즙이 지나치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지만 멜랑콜리 상태에 오래 머물면 자살 위험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사는데 아무 재미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의 기분 상태를 조절할 수 없다는 건 생물학적 요인 외에도 심리적,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젊은 날의 심순애처럼 스트레스 요인들이 한꺼번에 몰아 닥치면 충동적으로 자살을 떠올리기 쉽다. 다른 우울증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감정을 호소하는 경향이 적은 데다가 표정 변화도 거의 나타나지 않아 가족이라도 눈치 채기가 어렵다.
주변에 누군가 심순애 같은 사랑과 배신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면 한번쯤 들여다보자. 이들에게 말을 걸면, “응? 뭐라고 했어?”를 자주 듣게 된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둔해진 탓이다. 속으로는 깊은 공허감, 지나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기 십상이다. 옆에서 관찰 가능한 우울증 환자의 행동으로는 말하다가 자주 멈추기, 목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변함/ 대화할 때 시선이 멀리 고정되거나 상대와 눈맞춤을 안 하거나/ 어깨를 쪼그린 구부정한 자세/ 자신의 얼굴이나 몸을 자주 만지거나/ 머리나 팔 다리, 몸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 등을 볼 수 있다. 해가 짧아서 우울증이 더 많아지는 계절, 우리 곁의 심순애를 다시 한번 살펴볼 일이다.
www.kaykimcounsel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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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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