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새해의 시간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어김없이 한 바퀴 돌아서 제 자리로 온 셈이다. 그러나 지구의 한 바퀴는 인생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는 진지한 운동이다. 다른 삶보다 우리들 노년에게는 지구의 한번 공전이 자못 심각하다. 1년 전 거울 속의 나와 1년 후 내 얼굴은 천양지차다.
물론 나 자신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1년 전에 비해 확연하게 늙어버린 얼굴에 대한 실감이 없다. 늘 그대로인 줄로 착각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년배의 친구를 간만에 만났을 때 내 늙음을 순간이나마 확인한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인사를 나누며 말한다. “아니 어떻게 그대로지? 나이를 거꾸로 먹나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때 상대편도 거의 같은 대사를 약속한 듯 건넨다. 그때 깨닫는다. “아, 나도 저 얼굴이겠군.”
다시 말해 지구도 태양도 내 얼굴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든 공전과 자전의 궤도에서는 차별이 없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는 쓸데없는 말이 돌아다녀 자칫 허망함만 키울 수 있으니 삼가 할 일이다. 100세 시대 좋아하지 마라. 엊그제 백세를 채운 전 대통령 카터가 별세했다. 안 된 말이지만 백세를 카운트하고 떠날 때의 그분 얼굴이 어떠하던가.
어찌됐든 작년은 우리 인생과는 아무 상관없이 갔다. 되는대로 살겠다는 인생을 제외하고 또 한 해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한다. 물론 그 기대치가 크지는 않다. 어린애들조차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새해를 맞지 않는가.
계획을 거창하게 세워봐야 뾰족한 수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는 영악한 깨달음이 세상에 충만해진 까닭이다. 세상살이는 필연보다는 우연의 소산이라는 믿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삶은 우연과 필연 속에서 이뤄진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그 일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내 믿음을, 우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마구 흔들어대지만 그래도 믿음 편에 기대고 싶다. 신앙에 익숙한 사람은 그 필연의 신앙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그 빈틈없는 공전과 자전도 필연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1년 전 까지 없었던 깊은 주름이 눈가에 자리 잡은 일도 우연이 아닌 필연의 소산임을 나는 주장한다.
미국 여자가 겪은 에피소드 한편을 소개한다. 30대 후반의 여자인데 혼기를 한참 놓친 여자다. 나이가 많아지니 데이트 신청도 없다. 신앙인이어서 나름 기도도 열심히 했지만 속절없이 세월만 흘렀다. 하나님은 내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평생 독신을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타이어 한쪽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없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 세운 지 몇 초 후, 차 한 대가 느닷없이 뒤에 서더니 젊고 잘 생긴 남자가 내렸다.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타이어 바람이 빠졌다는 말을 듣고 상의를 벗어 던지고 스페어바퀴를 갈아주었다.
둘 다 퇴근하는 길이어서 여자가 고마운 마음으로 저녁을 내겠다는 제안을 했고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1년 후 그들은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며 잘 산다는 해피엔딩스토리다. 이 사건은 99.9%로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을 아주 드문 케이스다. 여자는 하나님이 그 때를 예비하셨다고 믿었다. 필연이다.
너무나 절묘한 시간에 타이어 바람이 빠졌다. 그 당시 차량의 교통량도 “만남”을 위해 적당했다. 차가 많았다면 남자가 늦게 그 장소를 지나갈 수도 있었다. 남자가 직장에서 나와 하이웨이로 진입할 때까지 있었던 수많은 신호등도 그 타이밍이 적당했다.
여자의 차 역시 회사에서 나오는 즉시 바람이 빠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바로 그 지점에서 빠졌다. 신기한 일이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필연이라고 그 여자는 믿었다는 일이다. 우연을 겹치게 한 필연의 그림은 이렇게 그려지는 것이다.
결혼만 그런 게 아니다. 인생의 생로병사가 다 필연적 타이밍이다. 정말 작은 계획이라도 있다면 누구에게도 입을 열어 발설하지 마라. 그 계획이 당신 가슴에 있다면 우연이란 가면을 쓰고 나타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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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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