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은 늘 그렇게 깔려있어 창문을 두드리는 달빛에 대답하듯 검어진 골목길에 그냥 한번 불러봤어/잠자는 나를 깨워줄 이 거기 누구 없소/누군가 아침이 되면 나 좀 일으켜 줘.-
한 해가 덧없이 지고 다시 한 해가 왔다. 가수는 노래한다. “누군가 아침이 되면 나 좀 일으켜 줘”
일어나고 싶지 않아도 벌써 해가 중천에 뜬 느낌이다. 잠언(箴言)은 교훈한다. 일어나라. 거기서 일어날 때가 되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다들 잠든 새벽 미명에 이 구절을 읽고 암송해보라.
이런 해학(諧謔)을 본 적이 있다. -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내가 배고플 때 깨워주세요!” 엄마가 대답했다. “아가야 배가 고프면 저절로 깨게 되어있단다.” -
요즘 차는 미러(mirror)장치가 너무 잘 되어있다. 뒤로 가야할 때 기아만 변속하면 자동으로 눈앞에 있는 내비게이션 창으로 백미러가 눈앞에 뜨면서 후방을 자세히 비쳐준다.
그러나 놀랄 때가 있다. 그것은 후방이 실제보다 너무 멀리 보인다는 것이다. 실물은 차체의 바로 뒤에 존재하고 있다. 착각하지마라. 작년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다. 2024년은 바로 엊그제다.
그뿐만이 아니다. 군대에 입대해 저 먼 설악산 자락에 갔을 때도, 청운의 꿈을 갖고 워싱턴 달라스 공항에 떨어진 일도, 아메리카의 대륙횡단도, 다 아련한 옛일이지만 생생한 어제의 사건들이다. 아득하지만 어제의 일들로 투영되어 다가오지 않는가.
다시 시작된 해는 절대로 어제의 해와 다르지 않다. 송구영신의 잠에서 깨어나 숫자에 불과한 새해를 받아드려야 한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므로. 어쩌면 당신이 까맣게 망각한 일이 새해 어느 날 불시에 당신의 창문을 노크할지 모른다.
새해는 어제를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다짐하자고 권고하겠지만 “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여전히 당신을 추격할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일어나야 한다. 엊그제처럼 어제처럼 오늘도 아침이 되면 “사망의 길”에서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어느 선각자가 말했던가. “모든 문명은 외부의 정복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로 붕괴했다.” 저 스스로 망했다는 것이다. 누가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저 혼자 흔들어대다가 어이없이 멸망했다는 말이다. 잘 나가는 것 같으나 결국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으니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는 얘기다.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한 진리다.
황혼의 삶이 되니 아침에 일어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때가 많다. 그래봤자 하루 한번 기상(起床)인데 바로 조금 전에도 일어난 듯한 기시감(旣視感)을 매일 느낀다. 그러니 피곤하다. 내가 아침에 잠을 깨고 일어난 나를 볼 때 육신의 눈으로 육신을 보기 때문에 그렇다.
잠언에서 말하는 경고는 속사람을 향한 권고다. 과연 작년 365일 중에 참으로 일어난 적은 몇 번이나 되었는가. 금년엔 어찌할 것인가. 기상하여 침상에 걸터앉아 눈을 감은 당신의 묵상(默想)에서 주인공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이따금 섬뜩한 일을 회상할 때가 있다.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뒤늦게 알아차리지만 이미 지나간 일의 예시였다.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돌아보라. 무심코 스친 일이 얼마나 많았을지 모른다. 365일이 매일 무미건조하고 매시간이 허탕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은 짐짓 망각하려 애를 썼던 날이 생각보다 많았을지도 모른다.
간 밤 꿈에는 정말 힘들게 이삿짐을 쌌다. 이삿짐 차에 빈틈없이 짐을 실었다. 꿈이었지만 팔 다리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차는 떠났다. 후련했다. 방안을 둘러보니 허접한 쓰레기 몇 점이 구석에 있었으나 그건 없어도 좋은 것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전혀 생면부지의 노파 한 분이 하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밖으로 나가더니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사를 도운 분 같았는데 나는 의식이 없었고 사라지는 노파의 굽은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일까. 새해벽두에 짐을 싸서 차에 실어 보낸 의미는? 그리고 끝까지 나를 도와준 정체불명의 하얀 노파는 누구란 말인가. 한참 후 침상에서 일어났다. 비몽사몽(非夢似夢)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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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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