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과 달리 도구와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침팬지도 나뭇가지로 개미 사냥을 하고 수백개의 기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어떤 동물에게도 없는 인간만의 능력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천국을 꿈꾸는 일이 아닐까.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현실에 국한된 삶을 살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가능한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이런 능력은 상상력과 직결돼 있다. 전문가들은 인간 창조의 원동력을 이 상상력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 능력은 구석기 시대 돌도끼에서 처음 발견된다. 자연 상태의 돌을 그냥 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모가 나 날카롭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상상하며 그런 물건을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능력은 훗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데까지 발전하며 그 궁극적 종착역이 천국이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열망은 현실이 더 고통스럽고 가혹할수록 커지게 된다.
천국에 대해 가장 깊게 생각한 사람은 아마 예수가 아니었을까.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 박해받던 유대 민족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수탈당하던 하층 계급 출신이었던 예수에게 천국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예수가 공생활을 하며 외친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태 4장 17절)였다는 사실은 그의 가장 큰 관심이 어디 있었는지 보여준다. 이는 또 세례 요한의 가르침(마태 3장 2절)과도 같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그리스 원문의 ‘메타노에이테’를 번역한 것이고 ‘메타노에이테’는 ‘마음을 바꾸다’는 뜻인 ‘메타노이아’(metanoia)의 명령문이다. 결국 천국과 ‘마음 바꿈’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바꾸라는 말일까. 기독교에서는 이를 인간 중심,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바꾸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장 21절)라고 못 박음으로써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분명히 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다르다. 성경에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언제 오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누가 17장 20절). 이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가만히 바라본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너희 안에 있다”(엔토스 휘몬 에스틴)라고 답한다. 여기서 ‘너희’는 물론 신의 은총으로 원죄의 사슬에서 해방된 ‘너희’를 뜻한다. 주목할 것은 ‘존재하다’의 현재형인 ‘에스틴’이란 동사다. ‘하나님 나라’는 과거에 있었거나 앞으로 올 나라가 아니고 지금 ‘너희’라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나라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예수의 말을 종합하면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뜻을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 이미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가장 큰 계명이라고 가르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유대 기독교 전통의 가장 큰 가치인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정의와 자비는 얼핏 상충되는 것 같지만 뿌리가 같다. 정의의 본질은 강자의 횡포를 막는 것이고 자비의 핵심은 약자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인데 이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히브리의 ‘정의’(체덱)와 ‘자비’(체다카)의 어원이 같은 것은 그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약자는 재빨리 도망다녀야 살아남는다. 인간도 한 때는 그랬고 아직도 인간 사회에서는 그런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 곳에 참 평화란 존재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운 것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인간들이 원죄의 노예로 자기 중심적인 삶을, 현대적인 언어로는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에 충실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된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본능적 충동을 따르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명을 거부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삶은 말은 쉽지만 실천은 지극히 어렵다. 그렇게 하면 공동체는 좋을지 모르지만 개인은 그럴수록 손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구세주마저 “하나님, 하나님, 어이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쳤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한 백약이 무효라는 점도 분명하다.
<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3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민 논설위원님, 말씀 감사합니다. 또렸하게 들려주시는 예수의 말씀과 현실에서의 인간관계, 알아듣기 쉽게 잘 표현해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민경훈 위원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백퍼 동감. 이런 남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이 지금의 우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마가 운동에 어긋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개신교인들은 마가 운동과 트럼프를 지지 하고 있지요. 지금의 개신교인들은 예전의 바리세인과 같은것 같습니다. 완전 변질 됬어요.
이웃은 나의 맘 속깊은 영혼은 나를 항상 지켜보고있는것 이웃이 나를 좋게 볼때 나는 자유롭고 천국에 살수있지만 이웃이 나를 천하게 악하게 볼때 나는 무엇을해도 이웃은 나를 돕지를 믿지를아니할것 그러니 내 주위의모두는 나의 행복도 성공도 이익도 자유도...줄수도 뺏을수도 있는 아주 아주 큰 존재들이라 할수있는데 어리석게도 하늘을 손으로 가리며 나만 끼리만 잘 살려고 잔꾀를부리는 무리들이 있어 지구촌은 혼탁하여 너도 나도 모두가 피해를보는 현 지구촌 언제나 이들이 맘을 바꿀까가 천국이 되냐 지오기 되느냐가 될 것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