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런 생각 중에서도 인생의 가장 치열한 시간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인 것 같다. 입시를 앞 둔 몇 달, 마지막 정리를 하며 분초를 아끼며 집중했던 그 시간이 생에 있어 가장 짙었던 삶의 농도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때가 청춘의 개막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의 독서, 또는 암기가 전 생애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십대의 마지막과 20대 초 중반기 시절에서의 탐구열이 삶에 대한 시각을 결정지은 셈인데 그때 사고(思考)하고 고뇌했던 일들이 지금까지 잔영처럼 남아 이끌어가고 있다.
엊그제는 오랜만에 인터넷 서점을 방문했다. 요새는 거의 인터넷으로 지적 욕구를 채우는 바람에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일은 정말 드문 “행사”가 되었다. 비록 인터넷으로 책을 일별(一瞥)하지만 그래도 책방의 문을 연다는 일은 미세한 느낌이긴 해도 어떤 설렘 같은 기분이 있으니 늙음에 비례해서는 다행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츠츠이 야스다카(Yasutaka Tsutsui)의 장편(掌篇)인 “웃지마”와 밀란 쿤데라의 옛날 책 “농담” 을 구입했다.
그때 문득 향수에 젖었다. 그 옛날, 벌써 수십 년이 흐른 저 편에서 책과 씨름하며 인생과 청춘에 대해 마음을 다 해 준비하고 몰두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입시를 핑계로 외웠던 시들도 아련하게 떠올라 그 편린(片鱗)을 반추해보았다.
- 눈물 아롱아롱/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 비 오는 서역 삼만 리/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
미당(未堂)의 “귀촉도”(歸蜀途) 도입부분이다. 미당의 시는 대학입시의 단골이었다. 이 시 외에도 “국화 옆에서”는 정말 어린 청춘의 가슴을 울렸던 명시가 아닌가.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는 늘 머리속에 맴 돈 구절이었다.
이 시와 더불어 우리들 가슴에 남았던 시들은 단연 청록파 시인들의 작품들이다. 그 중에도 박두진과 지훈(芝薰)의 시를 좋아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교양학부에서 조지훈교수의 문학개론을 들었는데 한동안 그의 직강을 기다리며 많은 낙서를 했던 경험이 있다. 지훈의 시 세계가 열리는 절창(絶唱)들이 그분의 나이 겨우 스무 살 즈음에 나왔으니 천재와 다름 아니다.
육사(陸史)의 “청포도”, 김동명의 “파초” 윤동주의 “서시”(序詩)도 즐겨 암송했던 우리들의 가슴이며 젊은 날의 백서(白書)였다.
10대와 20대에 걸친 첫 청춘은 두근거림과 아픔, 도전과 실패가 어우러진 사랑과 이별이 주조를 이뤘다면 신과의 대면으로 시작된 제2의 청춘은 뉘우침과 회개, 눈물과 자괴로 얼룩진 심연(深淵)이었다. 그래서 영혼의 슬픔이 배경 색조가 되었고 후일 슬픔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스며드는 통로였음을 깨달았다.
그때 내 마음을 달랬던 시는 시인 김현승의 “눈물”이었다. 어떤 분은 왜 그 좋은 시편(詩篇)을 두고 세속의 시를 운운하는가 힐난하여 마음을 상하게 했다.
- 더러는/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더욱 값진 것으로/드리라 하올 제/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이 시절 김수영의 “눈”도 애송했는데, 김수영 김춘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팬덤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소유하고 있던 시인이었다.
청춘의 끝자락은 뉴저지 변방에서 지냈다. 나이로 보면 청춘을 빗긴 때였지만 이 시대의 나이로 보면 그때도 확실히 청춘이었다. 그리움이다, 그 모든 추억들은 그리움의 집합이다.
그리고 청춘은 어느 한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은 황혼이다. 막을 수 없는 붉은 노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가슴을 물들이고 있다.
청춘은 어쩌면 그리움을 만들고 그렇게 사라지는 시간일 것이다. 가슴에 소설보다 시로 남아 있는 안타까운 사랑과 열정의 매듭이다. 황혼을 걸어간다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향한 투정이요 핑계의 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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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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