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 기상통보관 [유족 제공]
"1990년대까지 한국의 TV 일기예보는 단연 김동완 기상통보관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하얀 지도 위에 검은 매직펜으로 등압선과 전선의 배치를 마술사처럼 그려내며 친근한 표현을 통해 내일의 날씨를 전했다.
한국 방송의 일기예보를 개척한 '제1호 기상캐스터' 노루(老淚) 김동완(金東完) 전 기상청 기상통보관이 15일(이하 한국시간) 오전 5시께 부천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9세.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구공고 졸업 후 1958년 12월 수학 교사가 되려고 상경해 서울대 사대 원서를 내러가는 길에 우연히 국립중앙관상대 국립기상기술원 양성생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 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한국경제TV '성공스토리 만남' 인터뷰에서 "원서 접수가 마감됐다고 해서 '원서만 내게 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이원철 관상대장이 사정을 듣고 '시험을 치게 해주라'고 해서 접수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59년 국립기상기술원 양성소를 수료한 뒤 김포국제공항 측후소와 부산 수영비행장 측후소 근무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 관상대 예보관으로 활동했다. 예보관 시절 퇴근한 뒤 예보가 적중할지 궁금하고 불안해서 한밤중에 몰래 집을 나와 매일 1시간쯤 하늘을 보는 버릇이 생기는 바람에 부인으로부터 '바람피우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라디오에 나온 것은 1967년부터였다. 1965년부터 중앙관상대 직원이 방송국와 직통전화로 날씨보도를 거들기 시작했다. 선배 방송요원이 그만둔 뒤 그 뒤를 누가 이을지 논의한 끝에 고인이 1967년 3일에 한번씩 교대로 돌아가며 하는 방송요원으로 뽑혔고, KBS 라디오의 어업 기상통보관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통보관으로 활동하는 한편, 교대 근무를 이용해 연탄 배달을 하거나 택시를 몰기도 했다. 고인은 "1950년대에는 기상 업무라는 것이 생소한 개념이어서, 내가 관상대 다닌다고 하면 시골 어르신들이 '아니 젊은 사람이 관상 보는 일을 하다니, 쯔쯔…'하고 혀를 찼다"고 당시 실정을 소개했다.
당시 날씨 방송은 인기가 없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뉴스가 끝나고 "이제 기상대로 돌리겠습니다"란 말이 나오면 청취자들이 다 채널을 돌릴 정도였다. 고인은 청취자들이 날씨 방송을 듣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날씨와 일생생활 간 연결고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체감온도란 말도 내가 처음 도입했어요. 가령 '오늘 낮 최고기온은 영상 5도까지 올라가겠습니다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가 될 테니 옷차림에 신경 쓰십시오'라는 멘트가 대표적이죠. 이렇게 방송을 하니 방송국에서 전부 날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기상대장이 날 부르더니 '앞으로 방송만 전담해달라'고 하더군요."
이런 멘트도 했다.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과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날씨는 하루에도 서른여섯 번씩 변한다고 합니다. 봄 날씨는 최소한 하루에 세 번 변합니다. 아침은 썰렁하고 점심은 덥고 저녁에는 바람이 붑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벌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상대에서 김동완 통보관이었습니다." 고인은 "여우가 시집가는 날", "파리가 조는 듯한 더위" 등 독특한 날씨 해설로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기상청 기상통보관은 고인 때문에 만들어진 직책이다. "당시 내 직급이 계장(현 사무관)이었어요. 예보 말미에 '중앙기상대에서 김동완 계장이 전해드립니다'라고 말하자니 어감이 좀 이상합디다. 김동완 사무관? 이것도 어색했죠. 어느 날 KBS 방송에서 앵커가 '김동완 통보관이 전해드립니다' 이렇게 정리하더군요. 그때부터 김동완 '통보관'이 됐습니다." 나중에 기상청에 통보관이라는 공식 직제가 생겼다.
1970년대에 들어 동양방송(TBC)과 문화방송(MBC)에서도 제1호 기상캐스터로 활약했다. 국내 최초로 직접 매직펜으로 일기도를 그려가며 전달했다. 일기도를 직접 그려가며 일기예보를 하는 고인의 모습은 장안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큼 인기를 끌었다. 독일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외교관은 고인이 일기도를 그리면서 일기예보를 하는 모습이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며 방송을 녹화해 고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1981년 초 MBC가 "관상대 기상 통보관을 사직하고 방송만 해달라"고 섭외했고, 고민 끝에 1982년 10월부터 MBC 기상보도요원으로 활동했다. 1992년 3월초 프리랜서 선언을 했고, 1996년 9월23일까지 MBC에서 일했다. 당시 프랭크 밀스(Frank Mills)의 피아노 연주곡 'The Happy Song'을 BGM으로 사용했다. 1980∼1990년대 내내 MBC 9시 뉴스가 끝날 무렵이면 'The Happy Song'이 들리고, 김동완 보도위원이 화면에 등장하곤 했다. '날씨 아저씨'라는 애칭과 함께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케이웨더 이사로 활동했고, 2001년부터 케이블TV 기상정보채널인 웨더뉴스채널에서 '김동완의 기상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1997년∼1999년 한국일기예보회장을 지냈다.
2000년에 자민련 소속으로 고향 김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선거 중에 당뇨를 앓던 부인의 치료시기를 놓쳐 뒷바라지를 했다. 선거 때문에 모은 재산을 잃고, 빚도 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2010년 10월5일 MBC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방송에 출연했다. '날씨 때문에 속상하시죠'(1998), '날씨의 신비'(1999) 등 저서를 냈고, 국무총리표창(1975), 대통령표창(1993), 국민훈장 동백장(2010)을 받았다.
2007년 EBS '시대의 초상 - 내일의 날씨 김동완입니다'에서 "기상전문가는 날씨를 전해주는게 아니라 날씨를 해설해줘야 한다. 전달자가 아니라 해설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2010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는 "날씨 방송은 뉴스가 아닌 정보가 돼야 해요. 시청자들이 날씨를 활용할 수 있게 안내를 해 주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미모의 여성 캐스터들이 일기예보를 담당하고 있지만 선진국은 그렇지 않아요. 날씨 전문가들이 나와서 내일 날씨는 이러저러하니까, 이런 준비도 하고, 이렇게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정보를 줍니다. 우리는 일기예보를 뉴스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부속물로 다루고 있어요."라고 쓴소리를 했다.
김승배 전 기상청 대변인은 "고인은 당시 어려운 기상이라는 과학 정보를 쉽게 설명해 기상 과학 대중화를 이루신 분"이라고 말했다.
유족은 1남4녀로 김정선·김정경·김정미·김미경·김수영(아들)씨와 사위 강동수·구수회·윤성우·론씨, 며느리 이경민씨 등이 있다. 빈소는 이대서울병원 장례식장 8호실에 마련됐다. 17일 오전 7시30분 발인을 거쳐 김포 문수산 나무 곁에 안장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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