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문을 처음 읽던 당시 눈길을 끈 단어가 있었다. 제목에 큼지막하게, GOP. 앗! 비무장지대 지오피에서 북이랑 교전사태라도 터졌나?
내용으로 짐작하니 공화당(Republican Party)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금방 알아내지는 못하고 사전을 뒤져서야 GOP가 ‘grand old party’의 약자라는 걸 알게 됐다. 대단하고 유서 깊은 당이라. 아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황금기를 누렸다더니 그 자랑이구나.
그 자랑의 뿌리가 꽤 깊다. 공화당이 태어난 해가 1854년도라는데 이 표현이 빠르게는 1874년에 이미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랜드 대신 위풍당당(gallant)이라는 형용사가 붙기도 하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신생 미국을 하나로 지켰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다.
유서가 깊기로는 사실 라이벌인 민주당(Democratic Party)이고 그랜드 올드 파티는 민주당 또한 써온 표현이라고 한다. 켄터키의 민주당 주지사 취임사(1859년), 그 이듬해 대선 당시 코네티컷의 민주당 당보에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족보로 따지면 민주당이 더 길다. 건국 후 붕당 수준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이 주도하던 페더럴리스트(Federalists)에 맞섰던 토머스 제퍼슨의 데모크래틱-리퍼블리칸 파티가 그 뿌리니까.
본격적으로는 현행 20달러 지폐에 새겨진 앤드류 잭슨(재임 1829-1837)에 이르러 민주당은 근대정당의 형태를 갖췄다. 투표권에 재산 요건이 없어지면서 대중정치가 태어나던 시점이다. 물론 백인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정치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정치가 가장 인기 있는 연예 프로 역할을 하던 셈이다.
변방 무지랭이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동부 엘리트들은 휘그당(Whig Party)으로 모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쟤들이 싫어” 모인 휘그당은 결속력이 약했다. 서부 개척지의 노예제 허용을 놓고 나라가 시끄러워지면서 휘그당내 반대 그룹이 갈라져 나가서 만든 게 공화당이다. 그 공화당의 첫 대통령 후보가 링컨인 것이고. 세가 약화된 휘그당, 그리고 격동의 시기에 반짝 등장해서 아이리쉬 이민자들을 배척했던 노우 나씽(Know Nothing)의 아메리칸 파티는 소멸하고 공화 민주 양당 체제(two-party system)가 미국정치의 유전자로 굳어졌다.
양당이 사용하던 소문자 ‘grand old party’가 대문자 ‘Grand Old Party’로 공화당의 전유물이 된 시점은 19세기 후반으로 본다. 1884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자 제임스 블레인에 이르러 GOP라는 약자가 처음 쓰이고, 완전히 굳어진 것은 1888년 선거인단 확보에서 앞선 벤자민 해리슨이 일반 투표에서 앞선 민주당의 현직 클리블랜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라고 한다.
당의 공식 웹사이트(www.gop.com)에서도 보듯이 공화당은 GOP 석자와 코끼리를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2011년 CBS 방송의 조사에 따르면 지오피가 뭔 약자인지 아는 미국인은 45%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사정은 공화당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고.
그렇다고 심술궂은 노인들(grumpy old people)의 약자라는 식으로 공화당원들을 조롱하려는 것은 아니다. BTS가 뭔 약자인지 몰랐던 나도 마찬가지다. BYC는 안다마는.
제아무리 좋은 이름 갖다 붙이면 뭐하나. ‘링컨의 정당(the party of Lincoln)’이라고 강조한다 한들 링컨의 유산이 없는데. 트럼프가 20불짜리 지폐에 잭슨의 초상을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걸 봐도 그렇다.
흑인사회의 지지를 놓고 보면 공화가 민주 되고 민주가 공화가 된 상전벽해의 과정을 미국사회는 거쳤다. 이민자들이 궁금해 하는 대목인데 지난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진행된 이 환골탈태의 과정에는 후발 이민자들의 유입, 대공황, 루즈벨트의 등장 그리고 인권운동이 이어진다.
GOP라는 약자를 처음 접한 삼십년 전과 비교하면 당시의 공화당과 지금의 공화당은 또 얼마나 다른가. 티파티와 트럼프의 등장 이후 엄청난 변모를 목격한다. “정치는 생물”이라는데 생물은 진화를 하니 그 변화가 어쩌면 돌연변이처럼 당대의 사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해본다.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화요일 교육섹션에 정재욱 씨의 글을 연재한다. 소소하지만 공감이 가는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경험들을 독자들과 나눈다. 이 글 시리즈의 현판 ‘워싱턴 촌뜨기’는 미국의 수도에 살고는 있으나 여전히 낯설기만 한 ‘촌뜨기 신세’라는 작가의 뜻에 따라 붙였다. <편집자 주>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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