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스타트업, 앞다퉈 일본 진출
▶작년 일본 진출 신규 법인 266개
▶코로나 창궐 2021년의 2배 이상↑
▶ 일정부, 스타트업 10만개 육성 계획
▶엔화 약세로 초기 진출 비용 절감
▶뷰티·먹거리 ‘K 아이템’ 인기 한몫
▶리스크 관리 중시하는 일 기업문화
▶계약 체결까지 기업간 신뢰 쌓고 성과 낼 때까지 최소 1년 버텨야
한때 스타트업의 불모지로 불렸던 일본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한국 업체가 있다. 미용 정보 플랫폼 ‘강남언니’를 운영하는 ‘힐링페이퍼’다. 도쿄 랜드마크 중 하나인 시부야역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2022년 5월 한 달간 대형 옥외 광고판을 걸며 도쿄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안겼다. 힐링페이퍼의 시부야역 옥외 광고는 단기간에 이뤄낸 성장세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2019년 10월 강남언니를 일본어 발음으로 한 ‘강나무언니’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했고, 진출 4년 만인 지난해 417억 원의 매출과 122억 원의 이익을 내며 흑자 전환했다. 힐링페이퍼 관계자는 “이제는 일본 사업 성장 속도가 한국 사업에 영향을 줄 정도로 빨라졌다”며 “글로벌 미용 의료 플랫폼으로 성장시킬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국 스타트업들이 ‘제2의 강남언니’를 꿈꾸며 부쩍 일본 시장에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일본은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4조2,000억 달러(지난해 기준, 약 5,775조 원)로, 한국(1조7,000억 달러, 약 2,337조5000억 원)의 약 2.5배에 달하는 큰 시장이다. 한국·일본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지원하는 컨설팅 업체 YJ Inc.의 양영준 대표는 “인구가 한국의 2배 이상인 일본은 고객 충성도가 유독 높은 편이라 시장 진입 장벽이 높지만, 일단 넘기만 하면 캐시카우를 안정적으로 얻는 좋은 시장”이라고 말했다.
한국 스타트업들은 코로나19 종료와 한일관계 개선을 계기로 ‘재팬드림’을 이룰 문이 열리자 앞다퉈 일본에 법인을 세우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투자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기업 신규 법인 수는 266개로,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109개)의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이 한국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도쿄 사무소에는 이미 18개 독립실이 모두 찼지만, 입주 문의가 워낙 많아 방을 쪼개 2개 업체를 더 받았다. 중진공은 한국 스타트업의 진출 시도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5월 ‘K스타트업센터(KSC) 도쿄’를 개소해 지원을 확대할 방침이다.
한국 스타트업들이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지금이 투자받거나 초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적기라서다. 일본 정부의 스타트업 육성 정책에 시장에 막대한 자금이 돌 것이라는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 신한은행 일본 법인 SBJ은행 관계자는 “일본 스타트업 업계 분위기가 재작년부터 크게 바뀌었다”며 “도쿄대 졸업생이 대기업이 아닌 창업을 선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도쿄대에 창업 시설이 생겼고 와세다·게이오대도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다”며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일본 정부가 2022년 11월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스타트업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8,774억 엔(약 7조7,500억 원) 수준이었던 스타트업 투자 규모를 2027년까지 10조 엔(약 88조4,000억 원)으로 늘려 스타트업 10만 개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 투자뿐 아니라 스타트업에 출자하는 대기업과 보유 주식을 매각하는 스타트업 창업자에게 세제 혜택도 준다. 중진공 GBC 관계자는 “일본 정부는 스타트업을 통해 떨어진 생산성을 올리려는 계획”이라며 “한국 스타트업의 강점인 디지털전환(DX) 분야를 육성하려는 만큼 일본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기회”라고 말했다.
엔화 약세로 초기 진출 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는 점도 이점이다. 진출 초기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법인 설립 절차와 사무실 임대, 현지 임원 채용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양영준 대표는 “코로나19 직전 상태와 비교하면 엔저(엔화 약세) 영향으로 초기 투입 비용을 20~30% 줄일 수 있어 엔저에 대해 문의하는 기업이 많다”고 설명했다.
한일관계 개선과 한류가 맞물리며 ‘한국 아이템’에 대한 수요 증가도 솔깃하게 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혈당과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으로 인기 식품이 된 그릭요거트 ‘그릭데이’를 만드는 ‘스위트바이오’는 일본 진출을 준비 중이다. 지난달 5일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최대 식품 박람회 ‘푸덱스 재팬(FOODEX JAPAN) 2024’에서 부스를 꾸린 결과, 한국의 먹거리, 헬스에 대한 큰 관심에 가능성을 봤다. 스위트바이오 관계자는 “한국보다 7배 더 큰 일본 시장 진출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최대 민간 스타트업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관계자는 “일본에서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고 한류 붐으로 B2C 시장 진입이 비교적 용이해졌다”며 “일본 내에서 한국 소비재에 대한 수요 증가도 시장 진입이 수월해진 측면”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보다 규제가 적은 분야는 일본 시장에서 사업 가능성을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옆 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은 물론 법적 체계가 비슷한 점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관계자는 “일본은 선진 시장인 만큼 타국에 비해 법률, 규제 등에서 비즈니스 예측 가능성이 높아 시장에 잘 안착한다면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한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비대면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닥터나우’ 사례가 그렇다. 한국은 비대면 진료에 대한 규제가 이제 천천히 풀리지만, 일본은 이미 비대면 진료와 약 배송이 합법이다. 한국에서 준비했던 사업을 일본에서 구현할 수 있고, 서비스를 키울 기회라는 판단에 오는 6월 일본 서비스 정식 출시를 준비 중이다. 닥터나우 관계자는 “일본 국민은 서비스에 만족하면 타 서비스로 이동하지 않고 오래 사용하는 것이 장점”이라며 “일본에서 온라인 진료에 대한 인지도를 키우면 큰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 나라라는 점만 믿으면 안 된다. 기업 문화는 차이가 큰 만큼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일본 진출 시 3~5년 중기 계획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본 기업은 중장기적으로 안정감 있게 끌고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투자하거나 거래처를 바꿀 의사가 생긴다는 것이다. 눈앞의 매출, 영업이익보다 회사의 명성, 신뢰도를 중시해 중기 계획을 잘 설명해야만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신성욱 롯데벤처스재팬 인베스터는 “한국 스타트업은 대체로 현재와 미래 비전을 강조하지만, 일본에서는 먹히지 않을 수 있다”며 “리스크 관리를 중시하는 일본 기업 특성상 3~5년차 중기 성장계획을 요구하는 일본 투자자가 많다”고 전했다.
일본 기업·기업인과 신뢰가 쌓일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은 업무에서 효율과 합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일본은 계약 체결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보기술(IT) 대기업과 거래 이야기가 오가던 한국의 A스타트업은 비밀유지계약(NDA)을 체결하는 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자 답답해했다. 한국에서는 1주일도 걸리지 않는 일인데, 3주 가까이 지나도 답이 안 오자 조급해진 A사는 ‘일단 NDA부터 한 뒤 이야기를 계속하자’는 말을 꺼냈다. 그 순간 일본 기업은 ‘거래를 재촉한다’는 생각에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일본 노조미종합법률사무소의 유새벽 변호사는 “일본 기업인들이 한국 비즈니스에 대해 빠른 일 처리를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안전하고 안정감 있는 비즈니스 상대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 안목을 갖고 버티겠다는 자세도 필요하다. 최소 1년은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할 수 있다고 각오해야 한다. 힐링페이퍼 관계자는 “일본 비즈니스는 한국보다 사회적 자본, 신뢰가 중요하다”며 “최소 1년 이상은 시장을 탐색하는 단계로 보고 (생각보다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섣부르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신 인베스터는 “기업과 사업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해 일본 기업과 거래를 트는 데 1년이 넘게 걸릴 수 있다”며 “일본 시장 진출에 얼마나 진심인지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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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류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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