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포경산업의 중심이었던 울산 장생포항 부근에 대형 고래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고래박물관과 생태체험관, 고래문화마을 등이 조성돼 일대는 고래특구로 지정돼 있다. 서울에 ‘한강 뷰’, 속초에 ‘설악산 뷰’가 있다면 울산에는 ‘공단 뷰’가 있다. 태화강이 바다와 만나는 어귀에‘장생포문화창고’가 있다. 수산물 가공업체인 세창냉동 창고를 울산 남구가 인수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카페에 내리면 넓은 창을 통해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푸른 바다 대신 대형 공장과 곳곳에 솟은 굴뚝이 펼쳐진다. 공장 안으로 파고든 수로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선박 수십 척이 정박해 있다. 창가에 붉은 노을이 하늘을 덮을 무렵 이곳 풍광을 담은 사진 엽서가 기념품으로 진열돼 있다.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굴뚝이 자랑거리인가 싶은데, 묘하게 대한민국 대표 공업도시 울산의 힘의 느껴진다.
■고래의 전설 속으로,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그렇다고 울산에 공장만 있는 건 아니다. 인근 장생포항 일대는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돼 있다. 1960~1970년대 고래의 전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장생포 고래잡이의 역사는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태평양어업 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포경업을 독점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포경기지를 정비하며 장생포는 고래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인이 공동 출자한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돼 국내 포경산업의 역사가 시작된다.
1970년대 말 고래잡이가 전성기이던 시절 장생포에는 포경선 20여 척에 상주인구는 1만 명이 넘었다. 고래잡이는 5월부터 12월까지 강원 동해 근해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서해 어청도 부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985년까지 국내 포경선이 잡은 고래는 연평균 900마리에 이르렀다. 이렇듯 무분별한 포획으로 어획량이 줄고 일부 고래는 멸종 위기에 내몰렸다. 고래잡이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이 바뀌며 장생포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 포경을 금지해 고래잡이는 완전히 중단되고, 주민은 대부분 인근 공단으로 빠져나가 현재 인구는 3,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장생포는 여전히 고래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래고기 식당에 관심을 갖는 세대가 더러 있지만, 이제 고래는 더 이상 먹거리도 산업 재료도 아니다.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는 그 자체로 자유와 꿈의 상징이 됐다. 장생포고래문화마을 방문객의 상당수가 단체로 견학 온 학생이거나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방문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고래박물관(성인 입장료 2,000원). 앞마당에 포경선 ‘제6 진양호’가 전시돼 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고래잡이로 시작된 장생포의 역사가 펼쳐진다.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단연 대형 고래 뼈 실물이다. 혹등고래, 범고래, 상괭이, 큰돌고래, 참돌고래 실제 골격이 전시돼 있다. 상상보다 훨씬 커 과장되게 만든 모형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전시물마다 ‘진품’이라는 딱지와 기증자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박물관 옆 고래생태체험관(5,000원)에서는 대형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큰돌고래 네 마리를 직접 볼 수 있다. 한때 놀이공원에서 다양한 묘기로 탄성을 자아내던 ‘고래 쇼’는 동물학대라는 비난에 자취를 감췄다. 이곳도 쇼 대신 ‘고래생태설명회’라는 명칭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그럼에도 큰 바다에서 자유롭게 놀아야 할 고래를 가둬놓은 것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여전하다. 체험관 해설사는 수족관에서 태어났거나 오랫동안 생활해 왔기 때문에 방류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체험관의 고래는 각각 장꽃분, 장두리, 장도담, 고장수라는 이름과 함께 명예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았다. 장씨 성의 세 마리는 일본 와카야마현 고래박물관에서 기증받았고, 고장수는 2017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앞에서 헤엄치는 고래를 보는 건 여전히 경이롭다.
마을 뒤편 언덕에는 고래문화마을(2,000원)이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번성했던 장생포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책방과 문구점, 동네 점방, 중국집, 오락실, 사진관 등이 미로같이 좁은 골목을 따라 자리 잡았고, 마을 어귀에는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감 어린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교복을 빌려 입고 추억 사진을 찍는 여행객이 많이 보인다.
국내 포경산업의 중심이었던 울산 장생포항 부근에 대형 고래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고래박물관과 생태체험관, 고래문화마을 등이 조성돼 일대는 고래특구로 지정돼 있다.
■동해 수호 문무대왕비 전설 품은 대왕암
장생포에서 울산대교를 건너면 대왕암공원이 있다. 뭍에서 살짝 떨어진 바위섬이 대왕암이라 불리는 건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35㎞ 떨어진 경주의 문무대왕릉과 관련이 깊다. 통일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죽으면 용이 되어 바다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의지로 유해를 동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뜻에 따라 화장한 유골은 해변에서 좀 떨어진 큰 바위섬에 안장됐다.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난 문무대왕비도 남편처럼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고자 울산 대왕암에 잠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굳이 따지자면 경주 문무대왕릉과 부부 무덤이다.
공원 입구에서 대왕암으로 가는 약 600m 산책로에는 수령 100년 가까운 아름드리 곰솔이 숲을 이루고 있다. 진한 회색빛 줄기에서 바닷바람을 이겨내는 단단함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솔숲이 끝나는 곳에 2기의 하얀 등대가 보인다. 상대적으로 작은 울기등대 옛 등탑은 1904년 세워진 울산 최초의 등대다. 큰 등탑은 1987년 새로 지었다. 하얀 등대 주변 동백나무에 붉은 꽃송이가 주렁주렁 열렸고, 대숲 사이 매화도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울기등대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드디어 대왕암이다. 바다에서 살짝 떨어진 바위섬까지 철재 교량으로 연결돼 있다. 전설에서 벗어나면 일대는 지질박물관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파도에 닳고 닳은 바위는 매끈하면서도 근육질이다. 살짝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바위에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부서진다. 호위하듯 달려들고, 뿌리치듯 밀어내는 파도와 바위섬의 ‘밀당’이 계속된다.
주차장으로 돌아 나올 때는 해안 산책로를 권한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대왕암 바위 군상의 감동이 여운처럼 이어진다. 끝자락 출렁다리 너머로 아담한 일산해수욕장과 도심 풍광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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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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