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린만큼 보이는 풍경 - 청주 박물관·미술관 여행
‘노잼 도시’는 언젠가부터 대전의 다른 이름이 됐다. 대전시 입장에선‘의문의 1패’, 재미없는 도시라니 터무니없이 억울한 일인데, 그게 오히려 브랜드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특색이 없기는 인근 청주도 마찬가지다.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딴 지명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유서 깊은 도시인데, 청주 시내엔 오랜 역사의 흔적이 많지 않다.‘천년 고도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 소개하는 중앙공원에 고려 시대 관아의 부속 건물인 망선루, 충청병마절도사영문 정도가 있을 뿐이다. 공원 서편에 일부 복원한 청주읍성은 고도의 흔적이라 하기에 턱없이 작고 깔끔하다. 그럼에도 청주는 속속들이 알찬‘문화창고’다. 당당하게‘국립’이라는 간판을 단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고, 청주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전시실도 있다. 차가운 겨울, 따뜻하게 문화의 향기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속 보이는 전시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청주를 동서로 가르는 무심천 동편 내덕동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있다. 과천, 덕수궁, 서울에 이어 네 번째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건물 외관만 보면 ‘현대’와 거리가 있다. 높게 솟은 원통형 굴뚝을 모서리에 두고 투박하고 커다란 두 개 건물이 연결된 구조다. 한쪽은 국립현대미술관, 다른 한 갈래는 ‘문화제조창’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옛 담배 공장, 청주 연초제조창을 개조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연초제조창은 1946년 설립해 2004년 문을 닫기까지 지역 경제를 이끌던 청주의 대표 산업시설이었다. 공장으로서 역할을 마감한 후 14년간 방치됐던 시설이 약 2년간의 재건축 과정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로 탈바꿈했다.
청주관의 큰 특징은 작품의 보관과 보존에 특화된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이라는 점이다. 관람객에게는 없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인 수장고와 보존과학실을 일반에 개방한다는 점에서 ‘속 보이는’ 미술관이다. 그 핵심이라 할 미술품 수장센터 ‘라키비움’이 현재 임시 휴관 중이라 아쉽지만, 수장형 미술관의 진면목은 그대로다.
1층 로비에서 무료입장권을 발급받아 5층부터 한 층씩 내려오면서 관람하는 구조다.
매시 정각 10명 한정 15분간 개방하는 4층 특별수장고에서는 ‘드로잉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소장품 연구 활성화와 작품에 대한 집중적인 감상을 위해 특별히 조성한 공간이라 일반 전시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수많은 작품을 올려놓은 선반 여러 개가 조명 없이 중앙을 차지하고, 귀퉁이 4개의 작은 방을 전시실로 꾸민 구조여서 창고인지 전시실인지 성격이 모호하다.
각각의 전시실에는 이중섭의 ‘소년(1943-1945)’, 박수근의 ‘마을 풍경(1956)’, 유영국의 ‘산(1970년대 중반)’, 원석연의 ‘개미(1976)’, 서용선의 ‘소나무(1983)’ 등이 전시돼 있다. 드로잉에 대한 개념 변화와 작가의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는 전시다.
미술관과 붙어 있는 ‘문화제조창’은 한결 말랑말랑한 공간이다. 1층엔 카페와 식당이 입주해 있다. 높은 천장 아래 두 개의 통로 사이를 편하게 차를 마시거나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3층 상설전시장에선 연초제조창 아카이브 특별전이 열린다. 3,000여 명의 노동자가 연 100억 개비 이상의 담배를 생산했던 이 공간을 추억하고 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상대적으로 흡연율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찐 내 나는 담뱃잎을 만지던 노동자가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건물 5층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소리 내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열린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활자의 바다에 풍덩, 청주고인쇄박물관
무심천 서편 운천동의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 기념관이나 마찬가지다. 원통형 인쇄기를 본뜬 건물 외벽을 빙 둘러 가며 활자가 장식돼 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전통 주물기법인 밀랍주조법으로 복원한 직지 상·하권 활자판 78장이 관람객을 맞는다.
1전시관에는 직지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과 직지를 찍은 흥덕사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2전시관에는 고려의 목판인쇄술부터 19세기 말까지 국내 인쇄문화 전반을 소개하고 있다. 3전시관은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인쇄문화와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로 대변되는 유럽의 인쇄문화를 보여 준다.
무엇보다 영상으로 구현한 디지털 활자가 관람객을 황홀경으로 몰아넣는다. 초창기 활자를 만들려면 점 하나 찍고, 획 한 줄 긋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후에도 무수한 공정이 더해져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활자 영상이 벽면 가득 날아다니며 춤을 춘다. 말 그대로 활자의 바다에 풍덩 빠지는 기분이다.
‘직지’의 본래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 백운화상(白雲和尙)이 석가모니의 직지인심견성성불(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뜻)의 중요 대목만 뽑아 해설한 책으로, 우왕 3년(1377) 인쇄됐다. 책은 유명하지만 내용을 접할 기회가 드문데, 박물관에서 전자책을 통해 전문을 한글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다. 몇 구절은 전시장 말미에 장식물로 새겨 놓았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안타깝게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바로 옆에 직지를 간행한 흥덕사지가 있다. 흥덕사는 서기 849년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찰로 1377년 직지를 간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폐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약 600년이 흐른 1984년 택지개발 공사를 하다가 절터가 발견됐고, 후에 직지를 간행한 흥덕사라는 것이 확인됐다.
■금속으로 꽃피운 그윽한 역사, 국립청주박물관
무심천 주변에는 흥덕사뿐만 아니라 여러 절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공원 옆에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다.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한 용두사 절터에 남은 당간이다. 무심천 서편 제방과 맞붙은 용화사에는 7기의 석조 불상이 봉안돼 있다. 하천변 절터에 방치된 불상을 1902년 끌어올렸고 나중에 절을 세워 법당에 안치했다.
불상 외에 무심천에서 건진 400여 점의 유물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발굴한 청동반자 명문을 판독한 결과 무심천변에는 사뇌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한 대찰로 학계에서는 몽골의 4차 침입 때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의 ‘미술, 금속으로 꽃피운 문화’ 상설전시관에는 사뇌사를 비롯해 흥덕사, 용두사 등의 승려들이 수행을 하거나 불교 의례를 진행하는 데 쓴 갖가지 모양의 금속 공양구가 마치 설치 작품처럼 나열돼 있다. 고인쇄박물관에 복제품이 전시된 ‘흥덕사가 새겨진 쇠북’ 진품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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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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