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킹스 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경제적 불평등’을 꼽았다.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적 불만을 키우고 정치적 양극화와 포퓰리즘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적 기관과 제도에 대한 불신을 높여 민주적 지배를 훼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 40여 년 간 선진국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불평등이 심화돼 왔다. 불평등은 미국에서도 아주 극심하며, 부의 불평등은 소득 불평등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부의 대물림과 돈이 돈을 벌어주는 되먹임 작용 때문이다. 여기에 노동권의 약화가 맞물리면서 불평등은 한층 더 가속화돼 왔다.
소득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지니계수’(Gini coefficient)이다. 20세기 이탈리아 통계학자 코라도 지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이 값이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는 뜻이 된다. 통상적으로 0.4를 넘으면 소득 불평등이 아주 심한 나라로 분류된다.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운 완전한 소득 평등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만큼 0.3 이하면 바람직한 소득 평등 상태로 간주된다.
2019년 0.415였던 미국의 지니계수는 2021년 0.49로 높아졌다, 팬데믹 기간 중 미국의 불평등이 더 나빠졌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중산층이 가장 두터웠던 시기로 평가받는 1974년 지니계수는 0.353이었다. 미국은 지구촌 전체로 볼 때도 하위권에 속한다. 세계 최강국의 경제적 실태라고 믿기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이런 실태를 제대로 알고 있거나 깨닫고 있는 미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경제적 불평등에 둔감하고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로 미국인들의 개인주의 성향,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여전한 환상 등이 꼽힌다.
최근 공영라디오인 NPR과 로버트 우드 존스 재단, 그리고 하버드 공공보건대학원이 공동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중산층 응답자 가운데 절반이 되지 않는 41%만이 불평등을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상위 소득층 응답자들 가운데 불평등을 심각하게 여긴다고 밝힌 사람은 42%로 오히려 중산층보다 더 많았다. 왜 미국의 불평등이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문조사 결과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국민들이 소득 불균형과 불평등 실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을수록 그 사회의 계층격차가 적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경우 소득격차가 미국처럼 크지 않음에도 유권자들은 경제적 현실을 한층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 정치인들과 정부가 문제 시정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을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미국인들의 그릇된 인식과 무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평등의 해악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건강을 비롯해 구성원들의 복지와 관련된 각종 지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구성원의 건강과 범죄, 교육성과 등 여러 사회지표가 나쁘다. 이것은 진화론적으로도 설명이 된다.
진화심리학자 마틴 데일리가 미국 50개 주와 캐나다 10개 주의 소득 불평등과 살인 발생률 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니 불평등이 심한 주일수록 살인이 더 많이 발생했다. 데일리는 이것을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위험을 무릅쓰고 큰 것을 노리는 고위험 전략이 득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불평등은 경제성장과 경제위기 대처 능력 면에서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빈곤과 불평등이 개인 간에 존재하는 능력 차이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국가와 사회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숙명론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빈곤과 불평등은 공적인 개입을 통해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 좁게는 조세정책을 통해 경제적 격차를 완화해 주고, 보다 넓게는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정책들을 통해 약자들에게 기회의 문을 넓혀줌으로써 시장이 보다 공정한 경쟁의 장이 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공적인 개입, 그리고 정책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명백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너무 많은 유권자들은 이것을 제대로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냉철한 시각으로 이슈에 접근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이념적, 정서적으로 정치에 매몰되거나 쉬 혐오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익을 판단하는 사고의 기능이 저하된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불평등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정책을 실시할만한 역량과 의지를 가진 정치세력을 잘 선택한다면 불평등은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회의 불평등은 ‘숙명’이라기보다 많은 부분 유권자들의 선택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올 해 한국과 미국의 유권자들은 또 한 번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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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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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인들이 저소득층, 불체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에 쓰여지는 혈세가 아깝다고 한탄한다. 정부도 이 돈이 아까운거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우는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을 최소한대로 먹고 살게는 해줘야 사회가 평안해진다는것을 알기때문이다. 그들이 굶주려지게 놔두면 그들은 들고 일어난다. 즉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는거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도우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