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들 숨은 스토리
▶ 헝가리 출신 커리코 박사·유펜 와이스먼 교수 세계 최초 코로나19 mRNA 백신 기술 개발…커리코, 대학서 외면당한 뒤에도 ‘불굴의 연구’
펜실베니아대 의대에서 연구 동반자로 mRNA 백신 발명의 선구자가 되며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드루 와이스먼(왼쪽) 교수와 커털린 커리고 박사. [로이터]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커털린 커리코(68·헝가리) 바이오엔테크 수석부사장과 드루 와이스먼(64·미국) 펜실베니아대 의대 교수는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극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노벨상 의학상 위원회측은 지난 2일 수상을 발표하면서 이들에 대해 “이들은 함께 수백만의 목숨을 구했고, 중증 코로나를 막았으며 전체적인 질병의 부담을 완화하고 각 사회가 다시 정상화될 수 있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와이스먼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펜실베니아 의대는 홈페이지 첫 화면에 그와 역시 이 곳 특임교수로 재직 중인 커리코 수석부사장의 사진을 게시했다.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커리코 교수는 1978년 생물학 학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1982년 헝가리 세게드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생물학 연구센터에서 일하다가 1985년 미국으로 이민을 와 펜실베니아 의대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와이스먼 교수는 브랜다이스대에서 생화학 학사·석사 학위를, 보스턴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이후 국립보건원(NIH)에서 미국의 코로나19 대응을 이끈 앤소니 파우치 전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 밑에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연구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와이스먼 교수가 펜실베니아 의대 교수로 옮긴 1997년 이 둘은 처음 만나 mRNA 개발에 30년 가까이 힘을 합하며 평생의 연구 동반자가 됐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헝가리의 정육점집 딸로 태어나 mRNA 전문가가 된 커리코 교수가 와이스먼 교수를 만난 것은 1998년 펜실베니아대학 복사기 앞에서였다. 두 사람은 복사를 하러 줄을 서 있다가 인연을 맺게 됐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2008년 커리코 교수와 와이스먼 교수는 mRNA를 변형하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어 mRNA를 지질 나노입자로 포장하는 전달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mRNA를 신체의 필요 부위에 도달시켜 면역 반응을 촉발할 수 있게 했다. 이 기술을 토대로 개발된 화이자-바이오엔테크의 코로나19 백신은 2020년 영국 정부의 승인으로 세계 최초로 공식 승인된 코로나19 백신이 됐다.
이 같은 공로로 이 둘은 타임지의 ‘2021년 올해의 영웅’으로 선정되고 유명 의학상인 래스커-드베이키 의학연구상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의학·학술·연구 관련 10여개의 유력한 상을 휩쓸었다. 작년에도 유력한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로 꼽혔으며, 이번에 드디어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됐다.
특히 mRNA ‘백신의 어머니’로 불리는 커리코 박사는미국 대학에서 사실상 쫓겨날 위기까지 감수하면서도 mRNA 개발에 매달린 끝에 코로나19의 싸움에서 인류에 큰 기여를 한 그의 집념에 찬 인생 역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AFP통신은 커리코 박사에 대해 “mRNA 백신의 길을 닦은 과학 이단아(매버릭·maverick)”이라고 촌평하며 미 대학 측이 한때 그의 연구를 ‘막다른 길’로 치부하면서 교수직도 잃어야 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커리코 박사는 1955년 헝가리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수도와 TV, 냉장고도 없는 가난한 푸줏간집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회사 경리였다. 그는 과학자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과학을 잘했으며 8학년 때 생물학 분야에서 전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가 평생의 화두인 mRNA에 처음 매혹된 것은 고국 헝가리에 있는 세게드대 학부생 시절인 1976년이었다. 대학원 때인 1978년 그는 RNA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임신 중에 박사 논문을 썼다. 이후 1984년 유전자증폭(PCR) 기법의 개발을 필두로 미국에서 mRNA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지자 커리코 교수는 mRNA 연구를 위해 미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1985년 템플대에서 연구직 일자리를 얻은 그는 남편과 두 살 난 딸, 그리고 암시장에서 자신들의 차를 판 ‘종잣돈’ 900파운드를 배 속에 집어넣은 곰 인형 한 개를 들고 필라델피아로 이민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당시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는 100달러까지만 국외 반출을 허용했기 때문에 직접 ‘집도’해 곰 인형에 돈을 숨겼다.
하지만 이후 mRNA가 동물실험 결과 체내에 들어가면 면역계의 염증 반응을 일으켜 동물이 즉사하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미국 내 mRNA 연구 열기도 얼어붙었고, mRNA 연구에 매달리던 그의 입지도 위태로워졌다. 미국 의대에서는 통상 연구를 위해 연방정부 등 외부에서 연구 보조금을 타와야 하지만, mRNA 분야가 가라앉으면서 그는 mRNA 연구비 조달을 위한 보조금 지원서를 내는 족족 떨어졌다.
이에 1995년 무렵 펜실베니아대 의대 측은 mRNA가 비실용적이고 그가 시간 낭비하고 있다고 판단, ‘최후통첩’을 내렸다. 그는 교수로 선임되는 코스를 밟고 있었지만, mRNA를 계속 연구하려면 교수직을 포기하고 하위 연구직으로 강등되는 것을 감수하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같은 주에 암 진단을 받는 최악의 불운까지 그에게 닥쳤다. 그는 암 수술을 받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고심한 끝에 강등의 수모를 받아들여 박봉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하위 연구직으로 버티면서 mRNA 연구를 놓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어렵게 버티던 그에게 1997년 같은 대학으로 옮긴 드루 와이스먼 교수와의 만남은 전환점이 됐다. 당시 이미 저명한 연구자였던 와이스먼 교수는 외부 연구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의학 저널을 복사하기 위해 같은 복사기를 놓고 다투면서 그와 친해진 와이스먼 교수는 그와 평생의 mRNA 연구 파트너가 돼 연구비 문제를 풀어줬다.
결국 이런 집념의 연구가 20여년 이어진 끝에 그와 와이스먼 교수는 코로나19 mRNA 백신의 핵심 기술 개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커리코 박사는 이날 노벨상 수상 소식 후 스웨덴 라디오와 한 인터뷰에서 “내가 교수도 아니던 10년 전에도 어머니는 노벨상 발표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며 “어머니는 항상 방송을 들으면서 ‘어쩌면 네 이름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당시 나는 연구비를 받지 못했고 팀도 없었기 때문에 웃어넘기기만 했다”며 “그때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강등돼서 교수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에 ‘말도 안 된다’고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커리코 박사의 딸 수전 프랜시아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국 조정 대표팀으로 출전, 두 차례 금메달을 딴 유명 조정선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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