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ou again!” (독립된 조국에서 다시 보리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마지막 대사이다. 황기환 애국지사가 조국을 떠난지 119년, 순국하신지 100년 만에 그처럼 그리던 첫 광복절을 조국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황기환 애국지사 봉환식을 위해 4월 10일 새벽 5시 10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장장 16시간의 비행이었다. 뉴욕에서 부활절이 시작되는 9일 0시 25분에 출발하여 하늘에서 부활절을 지내게 된 것이다.
새벽녘 구름 사이로 비치는 태양 빛은 승리하여 조국으로 돌아오는 황기환 애국지사를 환영하는 열광의 박수이리라. 애국선열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 환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4월 7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뉴욕한인교회에서 고인의 추모방문이 있었고, 8일 오전 11시에는 뉴욕총영사와 뉴욕주 상원의원 등 저명인사들이 참가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9일 0시20분에 고인을 모시고 한국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8일부터 48시간 이상 잠을 설친 저희 황기환 지사 봉환 일행은 모두 지쳐있었으나 긴장했던 탓인지 하나도 피로감을 느낄 수 없었다. 정각 9시에 인천공항 계류장에서 영혼 봉헌식을 가졌다.
군악대에 맞추어 삼군위장대 호위 속에 고인을 모시고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 광복회원 대표들과 예식을 진행하였다. 20여년 전 고인에게 수여되었던 국민훈장 애족장이 이날에서야 비로소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고인의 영정 앞에 놓아드렸다. 묘비에 한국어로 새겨진 ‘대한인’ 과 똑같이 ‘대한인’이 새겨진 국민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독립된 나의 조국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나라를 잃었을 때 얼마나 비분 통탄하였던가. 1907년 이위종, 이상설, 이준은 황제의 칙서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갔으나 일본의 식민지라고 만국평화협의회에 참석을 못해 회의장 문 밖에서 칙서를 낭독하였었다. 1919년 1월 18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규식 박사와 황기환 서기장은 파리 평화협의회 참가도 거절당하였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칙서 낭독 며칠 후 심장이 터져 외지에서 순국하셨듯 황지사는 4년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순국하신 것이다. 독립된 나라의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묘비에 한글로 ‘대한인 ’이라 새겨놓았을까. 황 애국지사는 1923년 4월 17일 순국 100년만에 독립된 조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안기게 된 것이다. 10일 오전 10시 공항에서 식을 마친 후 곧바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향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삼군 군악대의 호위 속에 도착한 고인의 운구를 현충탑 중앙에 모시고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고인의 호적을 발표하였다. 국적을 찾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79-24, 279-22, 바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과 나란히 한 상해임시정부 기념건물이 있는 장소였다.
나와 내 아내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후 3시 조총 발사로 식이 끝나고 현충원 자체행사로 오후 5시에 안장식이 이어졌다. 우리 부부가 가족을 대표하여 고인의 무덤에 한줌 흙을 뿌리고 이어 흙을 덮었다. 조국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 121호가 황지사의 자리이다. 이곳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애국열사들이 묻힌 곳이다. 황 애국지사의 묘소가 마지막 자리였다. 몇 시간 늦었어도 새로 마련된 묘역에 묻힐 뻔하였다. 고인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애국열사들, 그동안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한자리에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뻐하실까, 고인을 안장한 후 눈물이 쏟아졌다.
고인의 묘소를 찾아내고 돌본지 15년,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늘나라의 가족들이 흘리는 눈물이었을까. 100년 기다린 끝에 대한인으로 자리를 찾은 고인의 감격스러운 눈물일까. 뉴욕에서 다시 뵐 수 없다는 석별의 슬픈 눈물일까. 이제 나는 그의 비석만이 서있는 뉴욕의 빈무덤을 찾아가야 한다.
모든 예식을 마친 일행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 밤 10시 가까워 호텔로 도착하였다. 다음날 11일 오전 10시 상해임시정부기념청사 광장에 모였다. 이 날은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0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동시에 황기환 애국지사의 호적이 이 주소로 기록되는 날이었다.
박민식 장관의 기념사와 더불어 황 애국지사의 호적 입적이 다시 한 번 선포되었다. 비가 내렸다. 영령들의 눈물일까. 우비도 쓰지않은채 다들 옷이 흠뻑 젖었다. 식을 마친 후 기념청사를 둘러보았다.
애국선열들과 만나는 것 같았다. 더욱이 황기환 애국지사의 호적지가 되었으니 그분의 집을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조국의 품! 바로 이곳이 나의 조국이다, 조국이 있다는 감격, 고아가 아니다. 조국의 귀중함을 다시 깨달았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배우고 깨달았다. 첫째 무슨일이든지 진실과 인내를 가지고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둘째 역사의 한 페이지는 적어도 100년은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일생에 가장 뜻깊은 경험이었다. 또한 보람이었다.
*황기환(黃 玘 煥, 1886~1923)지사는 미국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자원입대했고 1919년 프랑스에서 김규식 한국대표의 서기장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파리 한국친우회를 조직했고 런던주재 외교위원 및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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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전 뉴욕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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