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그 가공할 파괴력을 알게 된 후 던진 말이다.
오는 8월6일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78주년 되는 날이다. 사흘 뒤인 8월9일엔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됐다. ‘뚱보’(Fat Man)와 ‘꼬마’(Little Boy)라는 별칭을 가진 폭탄 두 발로 무려 2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리고 지금까지는 마지막으로 사용된 핵무기였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한다는 긴박함으로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에 비밀연구소를 만들고 미국 최고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을 집결시켰다. 당시 돈으로 무려 20억달러와 수천명이 투입된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이 오펜하이머였다. 하지만 그때 과학자들은 우라늄과 플루토늄, 방사능의 독성에 대한 이론적 지식만을 가졌을 뿐 핵실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인류최초의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1945년 7월16일 새벽 5시30분, 첫 핵폭탄 실험이 있었던 날은 뉴멕시코주 사막에 ‘태양이 두 번 떠오른 날’로 기록됐다. 먼저 실험용 핵폭탄 ‘가젯’(gadget)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16km 떨어진 관측소에서 보호안경을 쓰고 이를 목격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 눈부신 섬광에 넋을 잃었다. 40여초 후에는 버섯구름이 상공 12km까지 피어올랐고 그 열파와 방사능 낙진이 반경 120마일 내 창문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렸다.
이어 10분 후 진짜 태양이 떠올라 이제 전혀 다른 세상, ‘핵무기시대’로 진입한 새로운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날의 가공할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많은 사람들은 실제 일본에 떨어진 원폭보다 이날 뉴멕시코주 사막에 떨어진 최초의 핵폭탄 실험에 더 경악했다.
최근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도 이 핵실험의 순간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든 것이 멈춘 진공 같은 순간에 어마어마한 섬광이 작렬하는…. 첫 핵실험 장면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인류가 맞이한 가장 무서운 경험으로 묘사된다.
존 애덤스가 작곡하고 피터 셀라스가 대본을 쓴 현대오페라 ‘닥터 아토믹’(2008)은 원폭실험을 앞둔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 미정부관리들이 겪어야했던 불안과 고뇌, 갈등을 절박하게 노래한다. 미니멀리즘 음악이 날선 긴장을 조성하는 가운데 그날 새벽,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카운트다운이 새로운 세상을 예고하며 무겁게 막을 내린다.
데이빗 린치가 창조한 TV시리즈 ‘트윈 픽스’(2017) 역시 그 최초의 핵실험에서 태동한 악의 에너지를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다. 기괴한 인물들과 몽환적 연출, 초현실적 설정으로 유명한 이 미스터리 스릴러는 1990~91년 시즌 1과 2가 방영된 후 25년만인 2017년에 시즌 3이 나와 화제를 모았는데, 시즌 3 제8화에 사막 핵실험 장면이 길게 삽입된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때 나오는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수십대의 현악기가 집단적으로 내는 불협화음, 모든 것을 찢고 부수고 파괴하는 날카로운 소음에 머리칼이 일제히 곤두선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메멘토’ ‘다크 나잇’ ‘인셉션’ ‘인터스텔라’를 만든 놀란 감독으로서는 새롭게 시도한 전기영화다. 핵폭탄개발로 국가적 영웅이 됐다가 소련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한순간 명예가 추락한 천재물리학자의 영욕을 치밀하게 주시한다. 격동의 역사 속에 그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삶과 업적, 결함과 카리스마, 핵무기개발의 명과 암을 지적이고 사실적으로 관조한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 광풍’의 희생양이었던 그의 이름은 사후 55년이 지난 2022년 복권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일본에서 원폭이 사용된 후 깊은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이후 핵무기 개발에 완전히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내 손에 피가 묻어있다”고 호소했다. 이에 트루먼은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세상은 핵무기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무기사용 결정을 내린 나를 악당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이후 미국 정부는 원폭보다 파괴력이 수천배에 높은 수소폭탄 개발에 올인 하게 되는데 오펜하이머는 유엔 차원에서 원자력에너지의 국제통제를 주장하며 이에 강력 반대했다. 하지만 원자폭탄이든 수소폭탄이든 결국은 누구에 의해서든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류와 문명의 ‘발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AI)의 위험성에 직면하여 규제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를 막지 못하고 계속 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핵폭탄은 모두 원폭이 아닌 수소폭탄이고, 지금 세계가 보유한 핵무기는 무려 1만5,000개가 넘는다. 러시아(6,375개)와 미국(5,800개)이 전체의 93%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중국, 프랑스, 영국,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1945년 이후 아직까지 한번도 핵폭탄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위력을 전 세계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머 뮤지엄에서 8월20일까지 열리고 있는 컨템포퍼리 소장전(Together in Time)에 가면 특별히 눈을 사로잡는 영상(Crossroads/ The Exploding Digital Inevitable)을 하나 볼 수 있다. 미국이 1946~58년 태평양의 비키니섬에서 실시한 공개 핵실험기록영상이다. 미국은 거기서 23차례 핵실험을 했는데 그중 한 수소폭탄 실험에서는 섬 3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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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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