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 라거펠트의 삶 다룬 ‘파라다이스 나우: 칼 라거펠트의 비상한 삶’의 저자 윌리엄 미들턴
라거펠트의 삶 다룬 ‘파라다이스 나우: 칼 라거펠트의 비상한 삶’의 저자 윌리엄 미들턴
독일 태생으로 파리의 패션계에서 활약한 칼 라거펠트(2019년 85세로 사망)는 패션계의 신화적 존재였다. 이탈리아의 펜디 브랜드와 함께 파리의 샤넬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 세계 패션의 흐름을 주도했던 그는 영화에도 깊이 관여, 프랑스 영화‘미스트레스’와‘피의 결혼’ 및 스페인 영화‘하이 힐즈’를 비롯해 여러 편의 영화 의상을 디자인 했고 몇 편의 영화를 감독하고 또 영화에 출연도 했다. 한편 세계 굴지의 패션쇼 중 하나로 지난 5월 1일에 뉴욕에서 열린 2023년도‘메트 갈라’는 쇼의 주제를‘칼 라거펠트: 선의 미’(Karl Lagerfeld: Line of Beauty)로 삼았고 6월에는 마카오에 라거펠트가 디자인한 방 271개 짜리 초호화 호텔 칼 라거펠트 호텔이 문을 열었다. 백발에 굵은 테의 검은 안경이 자신의 브랜드인 라거펠트의 삶을 다룬‘파라다이스 나우: 칼 라거펠트의 비상한 삶’(Paradise Now: The Extraordinary Life of Karl Lagerfeld)의 저자 윌리엄 미들턴을 영상 인터뷰 했다. 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라거펠트의 사적인 삶과 함께 패션계의 안과 밖 그리고 패션계에 관련한 여러 예술가들과 스타 및 사교계 인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들턴은 하퍼스 바자와 W 및 위민스 웨어 데일리 등 여성잡지와 신문의 패션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라거펠트와 교우하며 그를 인터뷰 했다. 그는 작가로서도 여러 권의 패션 및 예술에 관한 책을 냈다. 파리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한 늠름한 모습의 미들턴은 질문에 진지하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라거펠트의 첫 인상이 어땠는지.
“1995년 내가 유일한 유력 여성 패션 일간지인 위민스 웨어 데일리의 기자로 활동할 때 파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의 프리뷰 때 만났다. 기자로서 쇼가 열리기 열흘 전쯤의 쇼의 예행연습을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와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을 때 내가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쇼룸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그는 마치 방에 나 혼자만이 있는 것처럼 대했다. 그는 자기와 대화하는 사람에게만 온 신경을 썼다. 그 것은 아름다운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를 만나기 전만해도 그가 두렵고 가차 없는 사람이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대와는 달리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는 표면상으로는 무섭고 힘든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를 알고 나면 무척 따스하고 친절하며 거의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주는 사람이었다.”
-책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파라다이스 나우’는 그가 프랑스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에서 따왔다. 기자가 그에게 후계자 문제와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고 묻자 칼은 ‘후계자, 난 그런 것 전연 신경 안 써요. 현재의 성공을 내내 누릴 만큼 살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파라다이스 나우’라고 대답했다. 모든 기사는 프랑스어로 썼지만 ‘지금이 천국’이라는 뜻의 ‘파라다이스 나우’라는 말만 영어로 썼다. 난 그 두 단어를 제목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칼은 철저히 현재에 초점을 맞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부제는 그가 과도한 삶의 스타일과 지출과 물질적 소비로 알려진 사람인 것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른 것이다. 그는 매우 복잡하고 문화적이며 지적인 사람이었다. 내 책은 그를 문화적 측면에서 본 칼 라거펠트의 문화적 전기라고 하겠다. 그와 동시대의 패션 디자이너로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었지만 칼은 자기 시대의 문화와 완전히 연결된 사람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그는 영화와 미술과 연극과 음악과 디자인 및 문화적인 모든 면을 철저히 알았던 사람이었다. 부제는 그가 자기 시대의 문화에 맹렬히 개입한 비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라거펠트와 영화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나.
“내가 기억하는 바로서는 그가 미햐엘 헤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을 보고 이틀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한 것이다. 내용적으로 매우 강렬한 이 영화가 자신의 어렸을 때를 기억나게 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칼은 이렇게 자기 삶을 자주 영화와 연계시키곤 했다. 그리고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꼈었다. 그는 여러 여배우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독일 배우 다이앤 크루거였다. 칼은 다이앤이 10대 때 모델로 일할 때 처음 만났는데 다이앤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그리고 그는 스타들의 레드 카펫 행사가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이를 펜디와 샤넬 브랜드를 위해 충분히 이용했다. 할리우드의 힘을 패션에 성공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칼은 또 사진작가이기도 했으며 몇 편의 단편영화도 감독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진작품은 좋아하지만 감독한 영화에 대해서는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
-칼은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그의 아버지는 가공우유 제조사를 소유한 부자였다. 칼은 어렸을 때 파리로 와 공부를 했는데 1954년에 열린 패션 디자인 경연대회인 울마크 프라이즈에서 코트 부문 최고상을 탔다. 이 대회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것으로 그 해 수 천 명이 응모했는데 이브 생 로랑도 응모해 드레스 부문 최고상을 탔다. 칼은 이로 인해 패션계의 유명 업체로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피에르 발맹 하우스에서 일하게 됐다. 그리고 1954년 파리에서 열린 피에르 발맹 패션쇼에 칼이 디자인 한 의상을 모델들이 입고 출연했다. 이 것이 그의 시작이다.”
-무엇이 칼이라는 사람을 그의 의상보다 더 유명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는지.
“그에 대한 대답은 칼이 말한 ‘천일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칼은 자기가 임금님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1천 1일 밤을 얘기를 한 셰헤라자드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이 자기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을 알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논란을 야기할 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뽐을 내고 으스대면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게 만들 줄도 알았다. 차에 탄 그가 ‘내가 당연히 걸어야 하지만 그러면 길에서 사람들이 늘 내게 일자리를 부탁한다’라고 말한 것이 그 한 예다. 이와 함께 그를 그렇게 실제보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그의 업적 때문이다. 그는 65년 동안 엄청나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1983년 파산상태에 이른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로 취임하자 일부에서는 독일 사람이 프랑스 패션 하우스를 지휘한다고 두런거리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의 그의 업적을 본다면 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개인적으로나 업적 면에서 모두 치열한 사람이었다.”
-칼의 취약성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칼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매우 혹독했다고 한다. 그가 한창 자랄 때 말을 천천히 한다고 ‘넌 말을 너무 느리게 해 그리고 네가 말하는 것도 아주 흥미가 없는 것이야. 그러니 넌 정말로 말을 빨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티롤 지방 사람들이 입는 스타일의 옷을 입었더니 ‘너 나이 먹은 여자동성애자 같아’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가 나치와 2차 대전의 어두운 때에 성장했다는 것도 그 한 이유로 들 수 있겠다.”
-칼에 관한 영화 ‘카이저 칼’이 만들어 진다고 하는데 그에 관여하는가.
“프랑스어로 쓴 전기를 바탕으로 만드는 허구의 영화다. 그런데 제목을 뜻하는 ‘황제 칼’은 칼이 싫어하는 반독일적인 것이다. 칼의 1972년도 한 해의 삶을 그린다고 하는데 난 관여 안한다. 나는 지금 이 책을 원전으로 한 기록영화 제작에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오스카상을 탄 배우 재레드 레토가 칼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자기가 칼로 주연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난 여기에도 관여하지 않고 있다. 좌우간 칼에 관한 여러 편의 영화들이 계획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칼이 돈을 안 쓸 대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난 칼이 돈을 쓰지 않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수많은 것에 대해 돈을 썼다. 칼이 죽은 뒤 어떤 사람이 칼의 친구에게 ‘칼이 수십억 달러의 부자였지 않은가’라고 묻자 친구가 ‘아침에 칼에게 수십억 달러를 주면 오후에 다 써버릴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칼은 소비를 제대로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과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칼은 사업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그에 대한 대답은 그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일한 아니타가 들려준 다음의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칼이 여자 재단사들을 저녁에 초대한 후 선물로 샤넬 가방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아니타가 칼에게 와서 재단사 중에 한 여자가 나이가 좀 들었는데 가방 색깔이 빨개 다소 어울리지가 않으니 다른 색깔로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칼이 검은 색 가방을 가져오자 아니타가 이제 빨간색 가방을 돌려주면 되겠네라고 말하자 칼이 그러지 말고 두 개 다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사업 경영을 잘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을 제대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패션 감각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숫자에도 매우 밝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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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흥진 골든 글로브협회(GG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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