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박자박 소웁탐방 - 태백 두문동재~대덕산 야생화 트레킹
바닥을 달구던 열기가 자꾸 수증기를 위로 밀어 올렸다. 지난 15일 오후 강원 태백과 정선의 경계인 두문동재(1,268m)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해발 고도를 고려하면 구름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싶다. 한여름의 따가운 볕이 가려지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슬그머니 내리고 단추까지 채운다. 이곳부터 금대봉 기슭을 거쳐 대덕산과 검룡소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는 약 1,000~1,300m 완만한 고산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짙은 그늘 속에 서늘한 바람 맞으며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지는 길이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피서지다.
■사람과 야생화가 풀어놓은 이야기 길
금대봉에서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국내에서 생태의 다양성과 식생이 가장 우수한 곳으로 평가받는 야생화 군락지다. 1993년 환경부가 지정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멸종위기 야생식물 7종을 비롯한 500여 종의 다양한 희귀식물이 서식하는 보고다. 두 봉우리의 머리글자를 따 금대화해(金臺花海)라고도 불린다. ‘꽃 바다’라는 별칭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들꽃이 피고 진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에서 탐방 예약을 해야 한다. 4월 20일부터 9월 30일까지 하루 500명에게만 허락된다. 태백산국립공원 두문동재탐방지원센터에서 예약 확인한 후에야 입산할 수 있다. 두문동재에서 검룡소주차장까지 전체 거리는 9.4km, 약 4시간 30분을 잡는다. 일행이 2대의 차량을 이용한다면 검룡소주차장에 1대를 세워 놓고, 다른 차로 두문동재로 이동한 후 걸으면 편리하다.
탐방로 초입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길 주변에 자란 키 큰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듬성듬성 볕이 스며드는 나무 아래는 온통 녹색의 바다다. 개별꽃과 졸방제비꽃이 군락을 이룬 융단에 한 달 후면 주황색 동자꽃과 보랏빛 투구꽃이 존재감을 드러낼 예정이다. 가녀린 대궁에 노란 꽃을 감아올린 감자난초, 분홍빛 꽃송이 쥐오줌풀, 초록 잎사귀에 진노랑 꽃잎이 돋보이는 태백기린초 등도 눈길을 잡는다.
숲은 어울림이다. 야생화는 잘 가꾼 꽃밭처럼 화려함을 뽐내기보다 여러 들풀이 어우러져 건강함을 유지한다. 대개 꽃송이가 탐스럽지 못하지만 앙증맞은 크기로 특유의 색과 향을 자랑한다. 숲에선 색이 곱지 못하거나 눈에 띄지 않은 식물도 홀대받지 않는다.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귀한 대접을 받는 야생화도 허다하다.
길잡이로 동행한 안주봉 태백산국립공원 해설사가 어둑한 길섶에서 나도수정초를 발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꽃대와 꽃잎이 차돌처럼 반투명 흰빛이다. 이런 식물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신비로운 자태다. 나도수정초는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땅속 균류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6월 초·중순 약 1주일 짧게 폈다가 지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귀한 꽃이다. 땅속에는 균류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숲을 가꾸고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과학기술이 우주까지 뻗어가는 시대라지만 늘 밟고 다니는 땅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수준이다. 5~6월 손톱보다 작은 꽃을 피우는 대성쓴풀, 길다란 꽃대에 몇 개의 꽃이 드문드문 달리는 나도범의귀도 한반도에서 백두산 외에 태백산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이라 한다.
두문동재에서 약 20분을 걸으면 금대봉과 고목나무샘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금대봉 정상까지는 500m, 그중 약 300m 구간은 급경사 오르막이다. 금대봉 정상을 포기하고 고목나무샘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탐방 예약 확인 절차를 거친다.
이곳에서 분주령 고갯마루까지는 평지와 완만한 내리막이 반복된다. 능선을 따라가는 이 길은 ‘불바래기길’로도 불린다. 예전 정선과 태백의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놓은 불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살펴보던 산등성이라는 의미다. 화전민들은 불의 경계를 보고 서로 구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 높은 산중에서도 갈등을 피하려는 나름의 규칙이 작동한 셈이다.
내리막 능선에서는 일시적으로 시야가 확 트인다. 백당나무와 고광나무 새하얀 꽃송이가 우거진 녹음을 배경으로 화사하다. 구슬댕댕이 노란 꽃잎도 말쑥하다. 큰 나무가 없는 비탈에는 광대수염, 노랑장대, 전호, 범꼬리, 미나리아재비, 터리풀, 꽃쥐손이, 꼭두서니 등 이름만큼 낯선 야생화가 쫙 깔렸다. 들풀의 이름은 단순하게 색깔로 짓지도 하지만 꽃, 잎, 열매의 모양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해살이의 특징까지 유심히 살펴 짓는다.
다시 숲길로 접어드니 자욱하던 안개가 결국 비로 변했다. 어둑해진 숲에서 바닥을 덮은 들풀이 한층 생기를 얻은 듯하다. 층층나무 아래 대바구니 모양의 관중과 단풍취, 속단 등이 짙푸름을 자랑한다. 융단처럼 깔린 일월비비추 잎사귀에는 물기가 번들거린다.
죽은 나무 아래 샘물이 졸졸 흐르는 고목나무샘을 지나면 일본잎갈나무 숲으로 접어든다. 화전민들이 살던 옛터에 군락을 이뤘다. 흔히 민족의 영산이라 부르는 태백산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나무는 의외로 드물다. 화전민들이 땔감으로 많이 벌목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심은 나무가 일본잎깔나무로 현재 태백시 산림의 13%를 차지한다.
나무 이름에 ‘일본’이 붙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고산지대 속성 조림목으로 이만한 나무도 드물다. 짙은 비구름에 나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 높이 쭉쭉 뻗었다.
이곳에서 내리막 피나무 쉼터를 지나면 분주령이다. 분주령은 태백과 삼척 산골 주민들이 오가던 길목이었다. 이 산줄기는 태백 상사미동에서 삼척 도계읍으로 넘어가는 건의령과도 연결된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실권을 빼앗기고 삼척으로 유배 온 뒤 살해되자, 그를 따르던 충신들이 관복과 관모를 벗어던지고 태백산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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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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