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다가 죽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서 가족들에게 행복을 안겨주었던 녀석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심장이 부어서 숨 쉬는 게 편해 보이진 않았다. 뒤뜰에 나갔다가 길고양이의 공격을 받아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까지 절고 있었다. 어머님께 애교를 떨어서 형님도 잘 안 주는 비프저키를 받아먹으며 놀길래 그만그만한 줄 알았는데, 힘들었던 모양이다. 강아지 나이 열여섯 살이면 고령견이다. 환갑이 지난 거나 다름없다. 말을 못 해 그렇지 여기저기 아팠을 것이다.
에다는 형님이 기르는 강아지고, 똘이는 어머님이 기르는 강아지다. 둘은 한집에 산다. 형님은 신생아를 기르는 엄마 같았다. 유모차에 에다를 태우고 밀어주다가 낑낑대면 꺼내서 안고 주고, 집안이 시원한데도 연실 부채질을 해주며 쓰다듬어 주었다. 달라스에서 네 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간 사람도 서 있는데, 소파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서 쿨쿨 자는 강아지들을 보니 “오뉴월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유모차에 납작 엎드려 그물망 사이로 식구들이 이야기하는 걸 보느라 목을 빼고 기웃거리는 모습도 귀엽고, 오래 얘기하면 자기에게 관심을 달라고 질투하는 것도 귀엽고, 애써 얻은 간식을 똘이한테 뺏길까 봐 욕심부리는 것도 귀여워서 그날따라 에다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강아지가 아파서 응급실에 갔는데 안락사가 최선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형님은 자기 품에서 에다가 편히 잠들 때까지 안아주면 안 되겠냐고 요청했지만,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켜보는 건 강아지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안 된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갔다가 강아지를 잃은 형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황망하여 울기만 했다. 드러난 병명은 없는데 요즘 들어 몸이 힘들고 만사가 귀찮아서 강아지 돌보기에 소홀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상실 후 밀려오는 감정 중 하나는 미안함이다. 잘해주지 않았던 건 아닌데 뭔가 부족하게 해준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형님 가족에게 에다는 막내딸이었다. 귀한 대접을 받고 살았던 에다도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행복을 주었던 존재였음이 분명했다. 전화로 형님을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영정사진이 되어버린 에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생생한 영상을 보며 또 울겠지만, 차츰 익숙해질 것이다. 잘 보내주는 것도 배워야 할 일이다.
나 역시 몸이 편치 않으니 누구를 챙기는 일도 힘들고, 어른들 찾아 다니는 일도 쉽지 않다. 장거리를 차로 움직이는 건 더더욱 힘들어서 남편과 딸만 보내고 오랫동안 시댁도 가지 못했다.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는 있지만, 늘 죄송한 마음이다. 체중 감량 후 전보다는 움직이는 게 수월해서 올여름엔 여기저기 움직여 보려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딸도 여름방학이라 집에 왔고 아버님 기일도 되어서 다녀왔는데 여러모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님도 에다와 함께 산 세월이 있으니 정이 들었을 텐데 괜찮으신지 연락해봐야겠다. 형님 위로 하느라 어머님은 미처 챙기지 못했다.
어머니의 동물 사랑도 특별하다. 결혼해서 박씨 문중 사람이 된 후 내가 아는 어머님 반려동물만도 꽤 된다. 강아지, 닭, 새, 햄스터, 고양이 등 종류도 다양하다. 시댁 장식장과 벽엔 아홉 명의 손주 사진과 미국에서 길렀던 동물 사진으로 빼곡하다. 나만 보면 사진기 가져왔냐고 묻곤 하셨다. 인화지에 인화하여 드리는 걸 좋아하셔서 액자에 넣어드리곤 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인애 애견 스튜디오’도 꽤 쓸만하다. 요즘은 동물을 기른다는 개념에서 반려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물론 놀러 가서 몰래 버리고 오는 무책임한 견주도 있지만, 대부분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반려동물 장례업에 반려동물 장례지도사까지 생겼다니 문화가 달라졌다.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극진하신 어머니는 집에 들어온 거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신다. 우리가 시댁에 갔던 날도 텔레비전에서 까마귀와 함께 사는 할머니가 나오는 프로를 보고 계셨다. 그날은 까마귀를 극찬하셨다. 요즘 온 동네 길고양이에게 무료 배식을 하시는 데 조만간 까마귀밥까지 무료 배식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는 밀워키다. 사촌 언니 집에서 생전 처음 보는 새 가족을 만났다. 옅은 밤색인데 몸집도 제법 크고 다리가 긴 것이 언뜻 보면 학과 생김이 비슷했다. 부부가 새끼 둘을 거느리고 잔디밭을 지나 도로를 건너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우리 동네 호수에 사는 오리 부부만큼이나 새끼 사랑이 대단했다. 차가 지나가자 어미 새가 새끼를 날개로 감싸 안고 날다시피 자리를 피했다. 그런 모정을 보면 눈물이 난다. 집에 가면 그 기특한 새 이름이 무엇인지 새 도감을 찾아봐야겠다.
딸내미 학교가 있는 세라소타의 바닷가 호텔에 묵었을 때 밤에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커튼을 꼭 닫아달라는 부탁 문구가 곳곳마다 붙어 있었다. 바다 거북이가 알을 낳으러 해변으로 올라오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곳 사람들의 배려에 크게 감동했다. 오늘도 어디선가 태어나고 죽는 일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이다. 잘 보내는 일도 중요하다. 잘 보내주어야 가는 걸음도 가볍지 않을까 싶다. 아무쪼록 형님 가족이 에다를 잘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정든 세월만큼 잊히는 세월도 길고 아프겠지만 그 또한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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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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