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올 것 같지 않은 가족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나와 아내, 아들 내외, 딸 내외와 어린 손녀가 한국에 계시는 증조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는 일이었다. 어르신들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다문화권인 사위와 며느리가 한국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원했다.
우리를 보시는 증조 외할아버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미소로 활짝 피셨다.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기억나는 순간들을 다시 꺼내어 기쁨과 추억을 나누었다. 몇 곳을 여행하는 동안, 한국에서 차를 재배하여 만드는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진한 초록의 밭에서 질서 정연하게 자라는 차나무를 보며 은은한 향기를 맡고 마셨다. 고국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않는다. 그러나 수천 년의 시간동안 인류의 사랑을 받아온 차의 빛과 향기 속에는 복잡하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얽혀 있었다.
차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기원전 2700년경 중국의 신농이라는 전설이 있다. 어느 날 바람에 날아온 마른 잎이 자신이 마실 물 위에 떨어진 것을 보고, 호기심에 그 맛을 보는데 물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고 독초의 기운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 후 중국에서 차는 주로 약용으로 ‘차를 마시면 힘이 생기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라고 하였다. 12세기경에는 일본으로 보급이 되었는데 정신 수양을 위한 도구로 차를 마셨다. 삼국시대에도 차로 손님을 접대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차문화가 발전하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서였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중국차를 수입해 유럽과 신대륙에 보급했다. 당시 마시는 차는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음료가 아닌 만병 통치약로 여겨지면서 상류층의 탐욕을 자극하게 되었다. 1689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차를 직수입하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선점하고 있던 중국차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런 다음 유럽전체에 차 문화를 전파하여 귀족부터 중산층까지 티타임을 즐기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유럽 문화권에서는 오후 티타임이 대중적이다. 한번은 아들이 어릴 적, 여행가서 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보통 때 같으면 몇 분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던 아들도 주위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압도 되어 점잖게 앉아 티타임을 잘 마쳤던 기억이 있다.
티타임 열풍이 계속되면서 영국은 연간 10만 톤 이상의 중국차를 수입하게 되면서 신대륙에서 약탈해 얻은 금과 은을 중국에 주어야 되었다. 영국은 본토에서 차를 직접 재배하려 했으나 기후가 맞지 않아 실패했다. 이후 영국은 다른 식민지, 인도와 스리랑카, 케냐 등지에서 홍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8세기에 차의 인기는 계속되었고 영국 동인도 회사는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 회사의 파산을 막고자 특혜를 주어 관세를 면제해주었다. 차를 밀수해 팔던 미국 이주민들은 영국정부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여 1773년 12월 보스톤 항에 정박해 있던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영국 정부는 미국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1774년 보스톤 항구법을 제정하고 주민들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반발이 더 커지면서 이 사건은 1775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1781년 승리를 확고히 한다. 차는 19세기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의 원인이기도 했다. 영국은 차를 수입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은을 주어야 했는데 은이 부족해지자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몰래 수출한다. 급속히 중국에 아편 중독자가 늘어났다. 이에 중국은 관리를 광저우로 보내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영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함대를 동원해 중국 주산열도를 점령하고 결국 ‘난징조약’을 체결해 홍콩을 차지하고 다섯 개 항구에서 자유롭게 무역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차의 향기 뒤에는 인간의 탐욕과 중독에 빠지기 쉬운 연약함에 대한 불편한 진실함이 숨어있다. “좋은 것을 잘 사용하면 우리의 몸과 영혼에 득이 되나 자칫하면 해가 된다.”는 진실을 차 한 잔이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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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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