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부채한도 증액 법안이 5월31일 하원을, 6월1일 상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은 5일이면 고갈되는 채무 지급용 재원을 국채 발행을 통해 다시 채워주는 법안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더라면 미국은 채무 불이행, 즉 ‘디폴트’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디폴트 국면이 장기화되면 대강 8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주식 값은 반 토막이 되리라는 재앙적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디폴트 상황을 막기 위해 부채한도를 높이려면 헌법상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이 그 조건으로 연방 지출 삭감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조 바이든 행정부와의 갈등이 시작됐다. 공화당의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출 삭감을 받아내 체면을 차리고 당내 강경파를 다독거릴 필요가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출 삭감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 이는 민주당 내 강성 의원들을 의식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 바이든 행정부가 국방 예산을 제외한 일부 프로그램의 지출을 삭감하기로 양보하면서 가까스로 타협이 이뤄져 디폴트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연방정부 부채한도 증액을 둘러싼 미국의 당파적 갈등 상황을 보면서 이런 재정적 디폴트 위기가 사실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디폴트’가 불러온 부산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연히 초당적 협력으로 극복해야 할 재정위기 상황이 정파적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파국적 영향력은 둘 다 마찬가지로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재정적 디폴트에 비해 정치적 디폴트는 서서히, 그리고 보이지 않게 다가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우려도 생겨났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정치적 디폴트란 무엇일까. 채무 불이행 상황에 빗대어 보면 정치적 디폴트는 정치인들이 자신을 선발해준 유권자의 집합적 요구를 책임감을 느끼면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누적돼 마침내 정치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상황에 봉착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가 국가채무를 갚지 못해서 나라 경제가 파국에 이르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국민의 집합적 이익을 대변하는 책임정치를 이행하지 못해 온 나라가 당파적 양극화와 갈등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바로 정치적 디폴트일 것이다.
이러한 디폴트 국면에 접어들면 정치는 정치 세력들이 상대방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고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적나라한 적대적 관계로 변질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당 간 협력과 의회 내 심의를 통한 집합적 공공재 창출은 매우 지연되거나 아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 불편함과 해악은 오롯이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정치적 디폴트 과정에서 실망하고 좌절한 많은 국민은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반대로 당파적 정체성을 체득한 일부 강성 유권자들은 진영 논리에 함몰돼 극단적 대결 정치의 팬덤 전사로 변한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정치적 디폴트는 반 토막 나는 주식처럼 세상이 결딴나는 벼랑 끝 상황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정적 디폴트와 그 외양이 다르고,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즉 민주주의의 정치적 디폴트는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무색무취하게 다가와 서서히 우리를 중독시키면서 파국적 상황으로 유도한다는 면에서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한쪽의 정치인들이 상대방 정치인들을 경멸하면서 진영 논리에 따라 갈라치기 정치에 나서고 유권자들이 자기 팀 응원을 넘어서서 아예 상대방 선수들에게 야유하는 것을 시민적 참여로 착각하면 민주주의의 정치적 디폴트라는 불길한 조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지속적 성찰을 통한 보편적 시민 의식의 배양, 자기 오만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인정하는 정당 간 공존 의식의 복원, 민주적 절차와 합리적 심의 과정을 통한 의회정치의 활성화, 극단적 세력과 절연하는 중도 지향형 확산 정치의 추진 등을 위한 집요하고도 끈질긴 노력만이 이러한 정치적 디폴트의 파국적 국면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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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권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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