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에 따라 주목받는 여행지도 구분된다. 이른 봄에는 가장 먼저 꽃 소식이 전해지는 섬진강 주변, 여름엔 강원도의 시원한 얼음장 계곡, 가을에는 꽃보다 화려한 전국의 단풍 명소로 관광객이 몰린다. 정읍 내장산국립공원도 단풍이 곱기로 빠지지 않는다. 10월 말이면 울긋불긋 화사한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관광객이 몰려 산도 사람도 몸살을 앓는다. 워낙 단풍으로 이름난 곳이라 이때를 제외하면 오히려 한가롭기 그지없다. 내장사 입구 상가도 대부분 문을 닫고 식당 두 곳만 영업 중이다. 녹음이 짙어가는‘초록별’ 단풍을 호젓하게 즐길 수 있는 적기다.
■단풍은 단풍인데 ‘초록별’ 녹음
단풍은 단풍인데 녹음이 가득하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내장사로 들어가는 도로는 단풍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버스는 지붕에 가지가 걸릴까 운전이 조심스럽고 그늘이 거의 들지 않는 도로는 한낮에도 어둑어둑하다.
도로가 끝나고 내장사로 접어드는 초입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한가운데에 하늘색 지붕의 정자가 보인다. 우화정이다. 우화(羽化)는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연못 주변에 자라는 단풍나무와 녹음 우거진 산자락이 잔잔한 수면에 비치면 우화정은 이름처럼 신선의 경치를 빚는다.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수면을 응시하면 작은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이따금씩 어디선가 나타난 물총새가 잽싸게 물고기를 낚아챈다.
우화정 위 일주문을 통과하면 다시 단풍터널이 이어진다. 불가의 철학을 반영한 ‘108단풍터널길’이다. 하늘을 뒤덮은 단풍잎이 황토색 흙바닥까지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나무 허리춤으로 연결한 연등이 한낮인데도 은은한 오색 빛깔을 뿜는다. 단풍 빛깔이 현란하지 않으니 발걸음에 집중한다. 번뇌는 괴로움뿐 아니라 즐거움을 탐하는 것에 뿌리를 둔다. 과거에 대한 회한, 현재의 괴로움, 미래의 불안함까지 살면서 겪게 되는 백팔번뇌를 녹색 그늘이 조금은 씻어줄 듯하다.
108단풍터널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내장사 경내로 들어선다. 백제 무왕 37년(636) 영은사(靈隱寺)라는 명칭으로 처음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출발부터 50동의 건물을 갖춘 큰 사찰이었다. 내장사와 영은사 2개의 독립된 사찰로 번창하던 절은 조선 중종 34년(1539) 도둑의 소굴로 지목돼 소각됐다. 이른바 승도탁란사건이다. 탁란(濁亂)은 ‘사회나 정치의 분위기가 흐리고 어지럽다’는 의미다. 당시 내장사 스님들이 집단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재건된 절은 한국전쟁 중 다시 소실되고 1957년 요사채, 1958년 대웅전을 건립했다. 유서 깊은 사찰이지만 건물에서 고찰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더구나 몇 차례 화마를 당한 대웅전은 2021년 다시 불에 타 현재는 임시로 석탑을 세워 놓았다. 자연히 건물보다 절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산세에 눈길이 간다. 석탑 꼭대기 너머로 내장산에서도 산세가 빼어난 서래봉 바위 능선이 우람하게 펼쳐진다.
전망대는 케이블카 상류정류장에서 약 300m 떨어져 있다. 팔각정 전망대인 ‘연자대’ 역시 옛날 관광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나선형 계단을 돌아 오르면 정면으로 서래봉 바위 능선과 그 아래 벽련암까지 웅장하고 시원스럽게 내다보인다. 서래봉 오른쪽으로는 국립공원 입구에서부터 우화정까지 지나온 길이 신록에 뒤덮여 있다. 초여름의 싱그러움에 눈이 시리다.
전망대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하산하면 다시 내장사 뒷마당이다. 부근에 단풍나무 단목으로는 최초로 202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가 있다. 돌무더기 산비탈에 비스듬히 뿌리내린 나무의 수령은 최소 290년이고 높이 16m가량이다. 높지 않은 지점에서 뻗은 가지마다 무수한 ‘초록별’이 바람에 일렁거린다.
■달아 높이 솟아… 정읍사의 무대는 어디일까
내장산국립공원 초입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내장저수지(내장호)가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두르는 산책로와 함께 내장산단풍생태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인근에서 묵는다면 호수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상류 습지와 연결되는 생태공원에는 여러 종류의 단풍나무를 심고 조류관찰대와 자생식물원 등을 조성해 놓았다. 공원 끝자락은 마을과 연결된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댄 논바닥에 서래봉 산줄기가 비쳐 또 다른 그림을 빚는다. 저수지로 흘러드는 맑은 개울에는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생태공원 인근에 조각공원도 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탐방로를 따라 여러 가지 설치미술이 숨은 듯 자리하고 있다. 전망대 겸 덱 산책로에 오르면 내장호가 시원하게 보인다.
조각공원 뒤편에서 솔티마을까지 연결되는 오솔길은 ‘솔티옛길’로 불린다. 옛날 솔티마을 주민들이 내장사를 오가던 길로 약 20분 코스다. 산비탈 숲과 농지 사이로 난 옛길은 특별히 경관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어 정겨움이 묻어난다. 옛길이 끝나는 지점의 솔티숲은 국가생태관광지로 지정돼 있다.
이름은 거창한데 실상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동네 숲이다. 대나무숲을 통과하면 소나무 편백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어우러진 작은 숲이 나타난다. 편백나무 아래에 평상이 몇 개 놓였고, 미니집라인과 통나무징검다리 등 어린이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인근 유치원과 학교에서 소풍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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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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