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시상식을) 보고 있는, 나와 생김새가 비슷한 모든 소년소녀들에게 이건 희망과 가능성의 횃불입니다. 이건 … 꿈을 크게 가져라 그러면 실현된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성 여러분, 누구도 여러분에게 전성기는 지났다는 말 못하게 하십시오. 포기란 없습니다.”
지난 12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미셸 여의 수상소감이다. 연기자로서 필생의 숙원이었을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순간, 그에게는 생김새, 희망, 가능성, 꿈, 전성기나 포기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양자경이라는 이름으로 친근한 배우 미셸은 말레이시아 태생이다. 부유한 화교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받으며 발레리나를 꿈꿨지만 척추부상으로 길을 바꾸었다. 홍콩 무협영화가 인기 있던 1980년대 홍콩에서 액션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90년대 후반 제임스 본드 영화에 출연하면서 할리웃에 진출했다.
아시아와 미국을 넘나들며 배우생활한 지 40년 그리고 나이 60에 비로소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장 제일 높은 단 위에 올랐다. 아시안 생김새, 여성, 나이 등 차별의 장벽들 앞에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없지 않았을 그는 감격에 차서 수상소감을 말했다. 게다가 1929년 오스카 제정 이래 아시안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니 감격할 만했다.
이번 제 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특별했다. 백인일색이던 오스카 시상식장에서 아시안이 이렇게 대거 눈에 띈 적이 없었다. 아시안 2세가 만든 아시안 이민가정 이야기 ‘EEAAO(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모든 게 도처에서 한꺼번에)’가 작품상, 감독상 등 7개상을 휩쓸었다. 수상자와 출연진 대부분이 아시안이어서 트로피 들고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여기가 할리웃 맞나’ 싶을 정도이다.
사상 첫 아시안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쾌거에 더해 기록은 또 있었다. 영화에서 미셸의 남편으로 출연한 키 호이 콴이 남우조연상을 수상, 아시안 배우 두명이 한꺼번에 수상한 최초의 해라는 기록이 세워졌다. 90여년 동안 오스카상 수상 아시안 배우는 단 네 명. 올해 아카데미는 아시안 영화인들에게 이정표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시안 배우들은 왜 이렇게 상을 못 탔을까. 챗GPT가 칼럼을 쓴다면 “아시안은 연기를 못한다”고 결론 내릴지도 모르겠다. 아시안이 상복 없는 이유는 키 호이의 경험에 부분적으로 담겨있다. 나이 51세인 그는 어려서 부모 품에 안겨 모국 베트남을 탈출해 보트생활을 했고, 홍콩 난민캠프에서 오래 지내다가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리고는 인디애나 존스에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로 들어섰지만 20년 동안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아시안 남성의 생김새로 마땅한 배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여기 할리웃 꼭대기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영화에서나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게 내게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지요.”
인생은 영화 같다고도 하고 영화는 인생의 축약판이라고도 한다. 세상의 모든 인생을 영화로 만들 수는 없고, 영화를 만드는 주체의 눈에 든 인생 이야기가 주관적 시각에 따라 극적으로 재해석되면서 영화라는 작품은 탄생한다. 선별과 해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인데, 선별과정에서 잘려나가고 해석과정에서 왜곡되는 것이 소수계, 종종 아시안 이야기들이었다. 영화에서 한인 리커업주가 엑스트라로 등장해 퉁명스럽고 돈만 아는 노랑이로 묘사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제작의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1920년대부터 영화를 만들어온 주체는 백인, 그중에서도 남성이었다. 이 사회의 주류세력이 영화판도 주도했다. 백인들의 경험과 감성을 담은 이야기가 선택되고 그에 맞는 백인배우들이 기용되면서, 제작 감독 출연진은 자연스럽게 백색. 백인만의 리그로서 높고 강고한 장벽을 두른 채 이따금 양념처럼 소수계를 받아들여 온 것이 할리웃 그리고 아카데미의 역사이다.
그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은 7년 전이었다.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도 연속 아카데미 남녀 주연/조연상 후보들이 전원 백인이자 ‘너무 하얀 오스카(#OscarsSoWhite)’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후보들이 새하얀 것은 아카데미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탓이라며 흑인 영화인들이 시상식 불참을 선언했다.
당황한 아카데미는 부랴부랴 ’인종적 다양성‘을 내걸며 그해 신입회원 중 여성(46%)과 비백인(41%) 비율을 늘렸고, 2017년 작품상에 ’문 라이트‘가 선정되었다. 흑인 각본/감독의 흑인 영화가 작품상을 타기는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 있는 일. 사회자가 백인 영화 ’라라 랜드‘를 수상작으로 발표했다가 뒤늦게 정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 상을 타고, 2021년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것은 이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뛰어난 인재도 수면 아래 묻혀서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 다양성에 대한 각성이 대세를 이루면서 수면 아래의 존재들, 인생들, 이야기들이 끌어 올려 져야 하겠다. 아시안이 주목받는 지금의 흐름을 타고 우리의 2세 3세들이 도처에서 한꺼번에 도도하게 두각을 나타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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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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