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 그치면/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푸르른 보리밭길/맑은 하늘에/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이 비 그치면/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임 앞에 타오르는/향연(香煙)과 같이/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시인이 65년 전인 1958년에 발표한 ‘봄비’다. 예스러운 시어가 발효 잘 된 묵은 김치처럼 깊고 진한 맛이 우러난다. 시인은 봄비가 풀빛을 짙게 할 거라고 읊조리고, 보리밭 길도 더욱 푸르게 변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봄은 만물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생동의 계절이다. 이러한 봄을 맞이하여 시인은 싱싱하게 물오른 자연의 활기찬 모습을 전통적 율조에 맞추어 예찬하고 있다.
종달새, 아지랑이, 특히 ‘푸르른 보리밭길’이라는 토속성이 강한 언어가 어릴적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보리 새싹을 넣어 끓인 보리된장국이 생각난다. 홍어애를 넣은 보리국을 생각하니 입에서 침이 저절로 나온다.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뒷동산에서 쑥 캐는 동네 처녀애들도 생각난다. 봄비는 추억속에 빠지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나보다.
봄철의 문턱에 접어들어 햇빛은 따스하지만 봄바람은 뒤 끝도 있고 위세를 부리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 밖을 보니 바람은 조금 잔잔해지고 기름처럼 귀한 봄비가 내리고 있다. 한 방울 한 방울 훈훈한 봄비가 멀리 있는 친구가 찾아 온 듯 반갑다. 밤사이에 시작한 봄비로 나무들도 잠에서 깨어나 겨우내 몸에 낀 먼지를 씻어 내고 있다. 방울방울 가지에 맺혀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될 거다. 땅 속 깊은 곳에 묻힌 씨앗들에게도 말을 거는 것 같다. 잠을 깬 토양도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하고 있다.
봄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좋은 영향을 주는 고마운 손님이다. 봄비는 봄 가뭄을 해소시켜 주고, 농작물에게 생명수와 같다. 봄철은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로 물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 봄비가 풍족해야 농사가 풍년이 된다. 음력 삼월에는 봄일을 시작하는 시기인 청명(淸明)이 있고, 벼농사에 때맞춰 비가 온다는 곡우(穀雨)가 있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는 속담이 있다. 기상이변으로 날씨가 사나워졌더라도 봄비는 많이 내려야 한다.
봄비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말한다. 기후 특성상 봄에는 비의 양이 매우 적기에 가뭄이 들 가능성이 크다. 봄 가뭄이 들면 농가는 비상이 걸린다. 그래서 ‘봄비는 쌀 비’라고 한다. 봄비가 많이 내리면 곳간이 찬다는 뜻이다. 올해는 봄비가 풍족하게 내려서 농사가 풍작이 되어 농민이 함박웃음 짓고 농산물 가격도 내렸으면 좋겠다.
바람은 불지만 춥지않는 온화한 날씨에 부슬부슬 때론 주룩주룩 내리는 빗방울은 겨우내 굳어있던 텃밭을 촉촉히 적신다. 파종한 한국 토종 푸른 상추, 적상추, 쑥갓, 대파, 도라지는 봄비가 모유와 같다. 농사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예보도 확인하고 하늘도 쳐다본다.
가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밭갈고 씨뿌리고 가꾸면서 부지런히 일해야한다. 요 며칠간 텃밭 가꾸기를 했더니 봄볕에 얼굴이 까맣게 탔다. 봄비가 내리면 새싹이 올라오고, 갓 올라온 새싹들을 농부의 따뜻한 눈길과 손길로 보살펴야 한다. 채소를 심고 가꾸면서 건강도 챙기고, 향수도 달래고, 힐링도 한다.
봄비는 여러 면에서 고마운 비다. 봄비는 산불을 예방한다. 산불의 58%가 봄에 발생한다고 한다. 봄철 메마른 산림을 적셔 산불 위험을 낮추고, 실제 산불이 발생했을 때도 진화에 도움을 준다. 또한 봄비가 한 번 내릴 때마다 공기 중에 있는 미세먼지의 60%를 씻어내 깨끗한 공기를 만들어 주고 청정 하늘을 만날 수 있게 한다.
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지만, 각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귀한 손님으로 찾아 온 봄비를 좀 더 반가운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해야겠다. 지금도 봄비가 내리고 있지만 옛날의 봄비 같지 않게 느껴진다. 하늘과 땅을 깨끗하게 하고 미세먼지도 씻어주는 봄비가 내 마음까지 촉촉히 적셔주면 얼마나 좋을까? 은은한 빗방울 맞고 톡톡 터트리는 여린 꽃망울을 보면서 봄비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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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모 / 워싱턴산악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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