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가스요금 청구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숫자가 너무 낯설어서 보고 또 보았다. 미국에서 수십 년 살면서 그중 부담 없는 것은 가스요금이었다. 아이들 떠나고 두 식구 사는 우리 집의 경우 월 가스요금은 10~20달러 선. 난방을 하는 겨울철에 좀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이 저렴한 데다 이곳 남가주는 겨울에도 따스하니 난방비 부담이 거의 없다/없었다.
올겨울 이 모두가 바뀌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한 세계적 천연가스 가격 상승에, 유례가 드문 한파로 가스 사용이 급증한데다, 서부지역 천연가스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가스 비용이 폭등했다. 미디어들의 보도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200달러에 육박하는 고지서를 받고 보니 믿기지가 않았다. 계산착오인가 싶어 옆집에 물어보니, 젊은 부부가 꼬마 둘 키우며 사는 이 가족의 가스요금은 지난달 168달러, 이번 달 372달러. 어린아이들이 있어 실내를 따뜻하게 유지했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 요금폭탄 수준이다.
자녀들이 한창 자라나는 30~40대 부부, 생활비가 한도 없이 들어가는 이들 가정은 어떻게 이런 추가비용들을 감당해낼지 걱정이 된다. 서민들에게 이 겨울은 가혹하다.
돈이 얼마나 있으면 사는 게 편안할까.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2010년 프린스턴 대학 연구이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감은 커진다, 하지만 연소득 7만5,000달러가 상한선, 그 이상 벌면 행복감에 별 차이가 없다는 내용이다.
돈으로 얻는 가장 소박한 행복은 ‘숨통’과 상관이 있다. 서민들의 삶은 청구서와의 싸움이다. 식품비, 렌트비, 교육비, 의료비, 난방비 … 밀려드는 청구서 지불하느라 숨 돌릴 틈이 없다. 이때 몇 백 달러만 여윳돈이 있어도 삶에 숨통이 트인다. 에이브라함 매슬로의 욕구단계론 중 가장 기본 단계인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만족되면서 얻어지는 안도감이다. 돈 걱정이 덜 하니 그만큼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최소한 이 정도 숨통 트일 만큼의 소득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달라질 것이다. 당장 들이닥칠 고지서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하며 성장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헤쳐 나가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말했다.
그는 경제발전이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가 맞았다는 걸 우리는 지금 분명하게 보고 있다. 그가 떠난 후 지난 반세기 미국경제규모와 빈부격차는 공히 엄청나게 커졌다. 부가 한쪽으로 치우친 결과이다. 최근 발표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성장의 과실을 달러로 환산할 때, 매 100달러 당 37달러는 소득 최상위 1%가 차지했다. 소득 하위 50% 즉 인구의 절반이 차지한 몫은 단 2달러. 부와 소득의 양극화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빈곤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해법으로 킹 목사는 기본소득 보장제를 촉구했다. 도움이 필요한 대상들에게 매달 아무 조건 없이 현금을 주자는 것이다. 그의 제안이 50여년 지난 지금 미 전국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소득보장 지지 시장들’이라는 단체에 100여명의 시장들이 가입했고 이들이 지휘하는 시험 프로그램이 수십 개에 달한다.
시작은 북가주 스탁튼이었다. 지난 2019년 2월 마이클 터브스 시장은 주민 125명을 무작위로 선정, 매달 500달러씩 지급하는 시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년 간 시행 결과 수혜자들의 재정적 안정은 물론 정신건강과 행복감, 개인적 성취도가 높아졌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오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LA 캄튼 롱비치 포모나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오클랜드 등 10여개 도시들에 더해 주정부 차원의 기본소득 보장 프로그램 7개가 시험가동 중이다. 임신 출소 등 삶의 큰 변화를 맞는 저소득 주민들을 대상으로 매달 600~1200달러를 12~18개월 보조해준다.
기본소득 보장제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다. 공돈을 주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이다. 하지만 스탁튼 프로그램 수혜자들의 경우 기본소득 지급 초기 무직이었다가 이후 직장을 잡은 케이스들이 많다. 아울러 전국의 시험 프로그램들 수혜자 대부분은 풀타임 근로자들이다. 일을 해도 소득이 연방빈곤선(2022년 기준 개인 1만2,880달러, 4인 가족 2만6,500 달러) 겨우 넘는 수준, 그렇다고 전통적 웰페어 수혜 대상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매달 수백 달러의 여윳돈이 주는 효과는 크다. 삶에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돈이 너무 많아 수천수만 달러를 무감각하게 쓰고, 다른 쪽에서는 식비 난방비 계산하며 불안하게 사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신이 이 땅에 피조물을 내면서 이런 모습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 일이 터지면 바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적어도 미국 인구의 절반이다. 파이의 남은 부스러기 2%를 나눠 갖는 소득 하위 50%이다. 제한된 기간 제한된 도움으로 그들이 두발로 꿋꿋하게 설 힘을 얻는다면, 살아갈 발판을 마련한다면, 사회적으로 해볼 만한 투자이다. 기본소득 보장제가 성과를 거두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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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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