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사자성어를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서민세상’이라고 대답하겠다.
‘서민(庶民)’이라면 의례 빈민, 천민 또는 범죄자를 연상하지만 그런 인식은 전혀 편견이다. 서민이란 단어를 계급주의적 관념으로 부유층, 권력층, 특수층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하게 위해 규정해 온 것이 고정 관념화 되었을 뿐이다.
논어에도 ‘공경대부이지사서인(公卿大夫而至士庶人)’이라는 경구가 있다.
고작대작에서부터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민이라는 말이다. 그 어느 누구도 직분이나 직위를 내려놓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평범한 서민일 뿐이다.
평균 76%의 한국의 국민이 자신들을 서민이라고 생각한다는 통계도 계속 나오고 있다. 노무현 후보가 ‘사람 사는 세상’ 기치를 내걸자 심지어 고위층 출신 이회창 후보까지 나도 ‘서민’이라며 덩달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필자가 ‘한국서민연합회’를 창립, 출범시킨 것은 1990년이었고 2006년까지 16년간 회장직을 맡아 이끌었다. 우리 근대 역사에 ‘서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최초의 시민단체였다. 창립 취지는 서민 본래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고 멸시, 천대, 편견, 악습을 퇴출시키자는 캠페인이었다. 한국서민연합회 발기 취지에 많은 언론들이 호응,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 사회의 서민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고 이제는 힘들게 일하는 직장인들에 대한 호칭도 많이 향상되었다. 환경미화원(청소부), 운전기사(운전수), 구두미화원(구두닦이), 간호사(간호원) 등등 힘든 직업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에 대한 존중 심리도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상류사회 인사들, 특히 정치인들이 버릇처럼 서민사랑이니 서민을 위한 정책을 운운하며 외치는 분위기다. 그러나 지난 한 해를 반추해 보면 역시 우리 서민들이 지도층, 상류층 기득권자로부터 철저히 농락, 배신당하고 속아 왔음이 한눈에 보인다.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보면 사회 전반의 각 분야가 분열돼 있다. 경제 혼란 무질서로 인해 서민들 수천수 만명이 전셋집, 전 재산을 몽땅 날리고도 하소연할 길이 없어 울부짖고 있다.
여야 정치판에 패권다툼은 이성을 잃은 감정대립, 극한투쟁만 이어지고 있다. 총칼만 들지 않았지 죽고 죽이기 일보 직전의 양상이다. 국민의 혈세를 받아먹고 사는 공인들이 국민 앞에 이따위 형태로 나라를 이끄는 사이 일반 서민 대중은 혼란에 빠져 들 수밖에 없다. 뻔뻔스러운 대국민 배신이다.
더 큰 죄악은, 논리도 어설프고 알맹이도 없는 보수·진보를 내건 패거리 싸움에 순진한 국민을 유혹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사회 전체 분열의 골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도층은 ‘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를 기억해야 한다.
오늘의 우리나라 정세는 1894년 동학혁명 민중봉기가 촉발되었던 그 시절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지도자 최제우와 전봉준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 기치를 내걸었다.
선진국의 기준이 뭔가. 서민대중이 인권을 보장받고 경제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동시에 서민 스스로도 자신이 나라를 이끌고 가는 당당한 일원이라는 주권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라는 고위층, 부유층이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서민 대중이 세금을 내고, 군대 가고, 학교문 열고, 상점을 운영하고, 환경을 미화하고 그래서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다. 대통령이니 국회의원이니 없어도 나라는 존재할 수 있지만 서민 대중이 없으면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철인 소크라테스도 늘 “너 자신을 알라”라고 가르쳤다. 함석헌 선생도 “깨어있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라고 강조했다. 고위층이나 자본가들이 서민들에게 감사하고 공손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벼슬아치 앞에서 굽신거리고 완장하나 채워주면 같은 서민끼리 무시하는 그 따위 비굴한 태도는 밟아 버려야 한다.
덧붙여 주위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은 그럴듯한 이념논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계급투쟁, 살육을 전제로 한 주체 사상이나 ‘인민민주주의(독일어 Proletarier) 따위는 서민이나 인민을 존중한다며 유인해 놓고 오히려 무자비한 인권 탄압 등으로 영구독재 정권을 획책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또한 끊임없는 정치 혼란과 자본가들의 국가 재산 독점 횡포라는 모순이 지적된다.
국민으로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돈독한 이웃 사랑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든 서민에게는 남북이 따로 없고 지역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다 같은 서민들이다. 민족 대단결 통일 그리고 화합·협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서민 제일주의(서민 민주주의)’, ‘서민 세상’을 화두로 뽑았다.
(571)326-6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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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 전 한민신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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