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잠이 오지 않거나 새벽에 화들짝 깨어났을 때, 다시 잠을 부르는 묘약은 책을 읽거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이다. 책은 소설류 말고 이론이 빡빡한 정보서적, 음악은 고전시대의 피아노곡이나 교향곡을 택하면 백발백중이다.
그런데 이 묘약이 듣지 않는 예외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임윤찬의 연주다. 그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 영상을 보다보면 졸리기는커녕 정신이 버쩍 들면서 갈수록 잠이 달아나는 바람에 그대로 밤을 꼬박 새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새해를 맞이하던 엊그제도 그랬다. 원래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3번을 들으면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임윤찬은 결선에서 마린 알솝 지휘로 2개의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첫 곡이 베토벤 3번이요, 두 번째가 라흐마니노프 3번이었다. 라흐마니노프 협연이 워낙 대단했던 탓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베토벤 협주곡 역시 어느 거장의 연주와 견주어도 좋을 만큼 탁월한 것이다.
38분이 넘는 베토벤 3번을 감상하고 나자 유튜브의 알고리듬에 따라 주루룩 따라 나온 콩쿠르 영상들이 또 유혹해온다. 그래, 모차르트 협주곡만 듣고 자자…
임윤찬은 준결선에서도 2개, 리스트의 초절기교 12개 연습곡과 모차르트 22번을 연주했는데 이때도 리스트 연주가 대박을 치면서 모차르트협주곡은 잊힌 느낌이 있다. 하지만 페달을 많이 쓰지 않고 맨 음으로 들려주는 그의 모차르트 연주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찬란하고 절제된,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아름다운 연주였다.
또 38분이 홀린 듯이 지나간다. 내친 김에 가슴 폭발하는 라흐 3번까지만 듣고 자야지… 이건 뭐 말할 필요도 없다. 유튜브 930만 뷰를 찍은 콩쿠르 사상 전무후무한 동영상이니 그대로 빨려들어가며 43분, 그 벅찬 피날레 감동에 잠이 올 리가 있나. 그래, ‘미친’ 리스트 연습곡으로 마무리하자…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3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날밤을 새게 되는 것이다. 열여덟 살 아이가 어떻게 이토록 사람 혼을 빼놓는 무서운 흡인력을 발하는 것일까.
임윤찬이 오는 5월10~12일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기로 갑작스레 결정되었다는 뉴스를 최근 들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뉴욕 사람들은 좋겠다’였다. 그의 실연을 보고 싶어하는 수많은 팬의 한 사람으로서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콩쿠르 우승 1년도 안 된 19세 청년이 뉴욕필과 협연하는 일은 아마 사상 처음일 것이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조성진도 뉴욕필의 정규 시즌에 초청된 것은 2022년 3월이었다.
임윤찬은 해당날짜에 예정돼있던 러시아 출신 지휘자(Tugan Sokhiev)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이슈로 취소되고 미국 지휘자(James Gaffigan)로 대체되면서 여기에 협연자로 전격 발탁되었다. 프로그램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이 연주가 뉴욕타임스 선정 ‘2022년 세계 10대 클래식공연’의 하나로 꼽혔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어쩌면 오케스트라가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혹시나 하고 온라인을 뒤져보니 3일간의 연주회 티켓은 먼 자리에 몇 장 남아있을 뿐 모두 매진되었다.
그러니 도대체 LA에는 언제나 올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바, 찾아보니 앞으로 2년여 동안 남가주의 주요 공연장에서 그를 만나볼 기회는 없는 듯하다. 밴 클라이번 수상자들은 3년 동안 재단의 관리 하에 연주회가 짜여지는데 이미 예정된 스케줄을 살펴보니 이렇게 실망스러울 데가….
임윤찬의 연주회 일정은 2022년 6월 콩쿠르 우승 이후 2025년 4월까지 미 전역은 물론 한국 및 아시아, 유럽 각국에서 80여회가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서는 작년 9월18일 샌호제에서의 첫 연주회에 이어 올해 4월23일 라호야의 뮤직 소사이어티, 10월7일 토랜스의 엘 카미노 칼리지, 9일 사우스베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전부다. LA의 주요 공연장이 아닌 로컬 무대에 선다는 점에서 못내 섭섭하기 짝이 없다. 제대로 된 그의 무대는 아마도 밴 클라이번 재단과의 계약이 끝난 후에나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윤찬에 대한 또 하나의 소식은 지난 11월말 세계적인 레이블 도이치그라모폰(DG)을 통해 첫 앨범을 발매한 것이다. 이 또한 콩쿠르 5개월 만에 대단한 업적인데, 놀라운 것은 홍석원 지휘의 광주시향과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황제’) 실황을 담았다는 것이다. 이제 막 떠오르는 젊은 연주자가 첫 음반을 낼 때는 유명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를 택하려 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그는 “세상에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많지만 저에겐 항상 광주시향이 최고”라고 했다. 자신과 잘 맞는 오케스트라를 찾아내고 명성에 개의치 않는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광주시향과는 2021년 송년음악회에서 라흐마니노프 3번을 협연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때의 연주가 콩쿠르에서 포트워스 심포니와의 협연보다 훨씬 더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콩쿠르의 긴장감 없이 여유롭게 감정을 표출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드러냈다는 평이다.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 음반에는 광주시향의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와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그리고 임윤찬이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몸포우의 ‘정원의 소녀들’, 스크랴빈 ‘2개의 시곡’ 중 1번, ‘음악수첩’ 등 3곡도 담겨있다.
한편 이번 일요일 8일 그의 대선배격인 조성진이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티켓은 이미 오래전에 매진되었다. 클래식 한류에 가슴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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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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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이렇게 감동가득한 글을 읽었으니 오늘하루가 기대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