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몇 시일까? 셀폰을 열면 바로 시간이 뜨는 시대이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시간이 정확하게 통일된 적이 없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저녁 먹고 나서’ 정도로 느슨하게 때를 정해 모이던 시절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와있다.
미국의 공식시간은 콜로라도, 볼더에 있는 국립 표준 및 테크놀로지 연구소(NIST)가 결정한다. NIST가 21개의 초정밀 시계들을 토대로 시간을 송출하면 전국의 컴퓨터 네트웍과 셀폰 타워들을 거쳐 개개인의 기기들에 전달되면서 전 국민은 똑딱똑딱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그 시간에 따라 비행기가 이륙하고, 직장인들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하며, 마켓이 문을 열고 닫으면서 사회는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진짜 시간이 아니라고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사회적 약속 같은 것일 뿐 시간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시간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요소는 중력.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은 느려져서 블랙홀 주변에서는 시간이 거의 정지된 상태가 된다고 한다. 공상과학 영화 ‘인터스텔라’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주인공은 우주여행 중 중력이 어마어마한 블랙홀을 통과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오니 딸은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되어 있다. 아버지인 그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여전히 젊다. 2017년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자인 킵 손 박사가 자문을 했다고 하니 이론적 근거가 있는 설정일 것이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세기 초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소개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다. “아름다운 여자와는 두 시간을 같이 있어도 2분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화덕 위에 앉아있으면 2분만 지나도 두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상대성이다.”
‘아름다운 여자’와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1년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라며 호랑이처럼 용맹스럽게 살기를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끝에 서있다. 시간이 시속 60마일 70마일로 달린다는 나이든 세대는 하나같이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잔인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린다. 자식이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아버지인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내쫓고 왕이 되었으니 두려워할 만도 했다.
크로노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레아는 아기 다섯을 남편이 삼켜버리자 묘책을 세웠다. 여섯 번째 출산 후 아기를 빼돌리고 돌덩이를 포대기에 싸서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아기가 바로 제우스이다. 예언대로 제우스는 훗날 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올림포스 신들의 왕이 된다.
아기를 꿀꺽꿀꺽 삼키는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이다. 시간은 이 땅에서 생겨난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부도 명예도 사랑도 생명도 … 시간을 버텨내지는 못한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간의 신이 있었다. 카이로스다. 크로노스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때, 아주 적당한 때나 기회를 의미한다. 활시위를 당겨서 과녁 뚫기 딱 좋은 바로 그 때 같은 것이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양적인 시간이라면 후자는 주관적이고 질적인 시간, 삶에 의미를 주는 시간이다.
제우스의 막내아들인 카이로스는 외양이 특이했다. 머리의 앞부분에만 머리채가 있고 뒷부분은 완전 반들반들한 대머리다. 등에도 날개, 발목에도 날개를 가진 그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태세이다. 카이로스를 잡으려면 방법은 하나, 앞에서 다가올 때 머리채를 잡는 것이다. 아니면 순식간에 달아나버린다. 기회는 다가올 때 잡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높은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한해를 돌아본다. 매일 아침 눈뜨면 주어지던 24시간의 시간 중에 무엇을 채우며 365일을 살아왔는가. 시간을 너무 아끼다 보니 시간에 매여 사는 것이 현대인의 역설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돈이다” 같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우리는 시간을 분초로 쪼개며 살고 있다. 결과는 주객의 전도. 시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이 시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점심 무렵’ 혹은 ‘저녁 먹은 후’로 시간관념이 느슨하던 시절 삶은 얼마나 여유로웠는가.
재깍재깍 옥죄는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야 삶이 삶다워진다. 매순간 동동거리며 사는 게 능사가 아니다. 시간을 다스리며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를 따라 사는 삶, 카이로스가 이끄는 삶이다.
구약의 전도서는 말한다.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통찰력을 가지고 때를 보며 움직이는 삶이다.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고 전도서는 이어진다.
한해를 마감하는 지금, 때를 따라 산 사람들은 추수를 마친 농부처럼 뿌듯할 것이다. 기쁨, 슬픔, 아픔 … 삶의 모든 경험들을 아우르는 알곡 같은 결실들로 충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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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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